박남수 시인 / 주막(酒幕)
토방(土房)마루에 개도 어수룩히 앉아 술방을 기웃거리는 주막……
호롱불이 밤새워 흔들려 흔들린다.
밤이 기웃이 들면 주정꾼의 싸움이 벌어지는 행길, 행길 앞 주막.
둘 사이 들어 뜯어놓는 얼굴이 바알간 새악시, 술방 아가씨.
술상이 흩어질 무렵……
마른 침에 목을 간지르던 마을이 소갈비를 구워 먹는 꿈을 꾼다더라.
초롱불, 삼문사, 1940
박남수 시인 / 창(窓) -1-
답답한 인정이 터쳐놓은 창가에 내가 앉았다.
어둠이 숨막히는 깨스처럼 몸 부비는 여기 창에는 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깨스가 폴폴 새어 나가고 있었다.
내 마음의 허전한 넓이처럼 허전한 하늘에는, 지금 하늘님이 뱉어 놓은 가래가 너저분히 희다.
귀가 큰 노자의 구름은 적막강산을 듣는다. 창가에 앉았는 나는, 지금 가슴이 아려서 기침을 한다.
답답한 인정이 터쳐 놓은 창가에 가슴이 아려서 가래를 뱉는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창(窓) -2-
창은 외경(外景)을 네모진 액틀에 끼워 방 안의 답답한 하루를 위무한다. 밖으로 열리는 눈을 즐겁게 하고 답답한 사람의 내부를 즐겁게 한다. 어두운 속을 밝히고, 저 멀리 멀리에 마음을 실어 가는 그리움을 만든다. 그리움으로 열리는 강에 다리를 놓고 사람과 사람의 가슴에 다리를 건넨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청계천(淸溪川)
온갖 오물(汚物)이 썩어 검게 빛을 뿜어도 이름은 청계천(淸溪川). 옛날에는 그 물줄기를 맑은 샘터에 박고 있었지만, 지금은 하수구(下水口)의 토사(吐瀉)로 더럽혀진 저 청계천(淸溪川)의 물잔등 위를 천렵(川獵)군의 배가 가듯 세도가(勢道家)의 차가 간다. 온갖 오물(汚物)이 썩어 검게 빛을 뿜는 청계천(淸溪川)은 덮였지만 온갖 오물(汚物)이 바람에 날리어 도시(都市)의 내장(內臟)을 더럽히고 있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박남수 시인 / 초봄의 꼭두 무렵
응달목에 흰 눈이 아직은 시린 초봄의 꼭두 무렵은 파릿한 파 내음의 파근한 종교. 파헤친 고랑마다 살찌는 파 줄기가 삐죽히 창을 뽑고 알 정신(精神)의 파릇한 건강으로 젊은 신처럼 서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칼을 간다
칼을 간다. 자르고 베일 것을 위하여 조심스레 날을 세운다. 부질없는 혹을 자르고 허욕의 군살을 도리기 위하여
칼을 간다. 날이 시퍼렇게 노(怒)하도록은 감정(感情)의 연한 기름을 찍어 낸다.
마지막 뼈를 동강내고 결국은 시퍼런 날만 서는 역사(歷史)의 칼을 돌에 대고 서늘하도록 서걱서걱 칼을 간다.
사슴의 관(冠), 문학세계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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