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진 시인 / 칠월(七月)의 편지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해, 청만사, 1949
박두진 시인 / 토르소
지금은 멀디 멀은 볕살의 나라에서 온 아가씨여 나의 앞에서 너는 자꾸만 날개 돋쳐 하늘로 하늘로 올라가고 그만큼의 공간에서 나는 나 혼자 할 수 없이 땅으로 땅으로 가라앉네
너의 예쁘디 예쁜 영혼의 날개의 화사한 무지개에 매달리는 내 영혼의 둘레 가의 알 수 없는 이 슬픔
그 볕살의 나라 볕살의 궁전에서 내려온 곱디 고운 영혼의 너의 뜨거움 꿈의 뜨거움 숨결의 그 뜨거움의 순수 인력은 견디지 못해서 전율하는 나의 열기 영혼의 날갯짓의 절망 속의 황홀로 마지막 부딪치는 돌격 앞에서도
너는 그 너의 영혼 몸뚱어리 예쁜 가슴 옹송그리며 멀디 먼 볕살 속의 볕살의 나라 무지개 속 훨훨 숨어 달아나 버리네
지금은 나의 앞에 말도 없이 있는 그러면 언제일까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그 별이 되어 꽃이 되어 이슬이 되어 폭발하는 폭발하는 너와 나의 영원한 순수 하나로의 영원은 언제쯤일까 아가씨여.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팔월(八月)의 강(江)
팔월(八月)의 강(江)이 손뼉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몸부림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고민한다. 팔월(八月)의 강(江)이 침잠(沈潛)한다.
강(江)은 어제의 한숨을, 눈물을, 피흘림을, 죽음들을 기억한다.
어제의 분노와, 비원과, 배반을 가슴 지닌 배암과 이리의 갈라진 혓바닥과 피묻은 이빨들을 기억한다.
강(江)은 저 은하계(銀河系) 찬란한 태양계(太陽系)의 아득한 이데아를 황금빛 승화(昇華)를 기억한다.
그 승리를, 도달을, 모두의 성취를 위하여 어제를 오늘에게, 오늘을 내일에게 위탁한다.
강(江)은 팔월(八月)의 강(江)은 유유하고 왕성하다. 늠름하게 의지한다. 손뼉을 치며 깃발을 날리며, 오직 망망한 바다를 향해 전진한다.
인간밀림(人間密林), 일조각, 1963
박두진 시인 / 평원석(平原石) 이변(異變)
고향이었다. 어릴 때였다. 풀밭, 들길, 논두렁길이었다.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랑캐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아침 이슬이 발끝에 차였다. 후르륵후르륵 벼메뚜기가 날았다. 짹, 찌기 찌기 찌기 찌기……짹, 찌기 찌기 찌기……, 여치가 한 마리 울고 있었다. 아무도 없고 혼자였다. 햇볕이 쨍쨍 뜨거웠다.
둑 아래 맑은 웅덩이에 붕어떼 노는 것이 보였다. 금붕어였다. 붉은 빛, 깜정빛, 무지개빛 열대어였다. 잡고 싶었다. 어릴 때 마음 그대로, 훌훌 벌거벗고 뛰어들어 모조리 훔켜서 잡고 싶었다. 가슴이 두근댔다. 잡을까 잡을까 망설이는데 이상했다. 갑자기 붕어가 간 곳 없고, 한 마리씩 한 마리씩 호랑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마음이 언짢고 슬펐다. 그렇고나, 내가 지금 어릴 때 고향으로 낙향을 온 거지, 정말 그렇게 절실하게 실감이 나는 실감. 그 죽음의 도시 서울, 모든 것 다 버리고 영원히 이곳으로 낙향을 온 거지, 혼자서 엉엉 울면서 걸었다.
개구리가 한 마리 펄쩍펄쩍 뛰었다. 주먹만한 청개구리, 얼룩덜룩한 콩밭의 청개구리. 헐덕헐덕 당황하며 바로 내 발 앞을 가로질렀다. 이상했다. 다시보니, 새끼 뱀장어만한 독사가 한 마리 청개구리의 덜미를 깊숙히 물고 늘어져 있었다. 가엾어라 청개구리가 죽는구나 저렇게 먹혀서 죽는구나 하고 망설이는데 이상했다. 청개구리가 커다랗게 한 번 땅재주를 넘더니 큰 입 쩍 벌리고 독사를 통째로 삼켜 버렸다. 신났다. 햇볕이 쨍쨍 쬐이고 있었다.
저만치 동네가 하나 보였다. 둥치가 붉은 적송이 몇 그루 서 있고, 초가집이 네댓 집,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동네였다. 쓸쓸하고 슬펐다. 저기가 아마 옥이네 동네 저 집이 바로 옥이네 그 집, 쑤루룩 쑤루룩 가슴이 무너졌다. 어디 갔을까, 어디 갔을까, 그 눈동자 까만, 눈썹 까만, 희디 흰 살결의 어릴 때 옥이. 어릴 때 그 때처럼 훌적훌적 울었다. 옥이네 옛 동네는 비어 있었다.
가도 가도 풀밭, 아무도 없고 나 혼자뿐이었다. 쨍쨍 햇볕이 퍼붓고, 모든 것 다 버리고 온, 죽음의 도시 서울 영원히 영원히 아득하고, 띠리루루 띠리루루 낮 귀뚜라미 잊은 듯 다시 울고, 민들레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오랑캐꽃이 한 송이 피어 있었다. 온 들 온 풀밭, 가도 가도 아무도 사람이라곤 없고, 사실은 어디로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울었다. ―주여 나 여기에 왔나이다. 여기에 홀로 있나이다. ―풀밭 빈 들 어릴 때 그 고향 그 논두렁……흑흑 느끼는데 이상했다.
아까 그 개구리 녹색 얼룩개구리가 펄적펄적 나타났다. 금테두리 두 눈, 금테두리 입, 금테두리 두꺼비처럼 불컥불컥 숨을 쉬며, 볼 동안에 크게 크게 온 몸뚱이가 부풀어올랐다. 거대한 몸뚱어리, 주홍빛 거대한 입 쩍 벌리고, 놀라웠다. 하늘 중천의 햇덩어리, 주렁주렁 내려오는 금빛 열 개의 햇덩어리를 하나씩 늘름늘름 삼켜 버렸다. 온 들에 뒤떨어져 나만 혼자 서 있고, 대낮인데 어둠 펑펑 밤눈 펑펑 쌓였다.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4
박두진 시인 / 푸른 하늘 아래
내게로 오너라. 어서 너는 내게로 오너라. ―불이 났다. 그리운 집들이 타고, 푸른 동산, 난만한 꽃밭이 타고, 이웃들은, 이웃들은, 다 쫓기어 울며 울며 흩어졌다. 아무도 없다.
이리들이 으르댄다. 양떼가 무찔린다. 이리들이 으르대며, 이리가 이리로 더뷸어 싸운다. 살점들을 물어 뗀다. 피가 흐른다. 서로 죽이며 자꾸 서로 죽는다.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싸우다가, 이리는 이리로 더불어 멸하리라.
처참한 밤이다. 그러나 하늘엔 별―별들이 남아 있다. 날마다 아직은 해도 돋는다. 어서 오너라.…… 황폐한 땅을 새로 파 이루고, 너는 나와 씨앗을 뿌리자. 다시 푸른 산을 이루자. 붉은 꽃밭을 이루자.
정정한 푸른 장생목도 심그고, 한철 났다
스러지는 일년초도 심그자. 잣나무, 오얏, 복숭아도 심그고, 들장미, 석죽, 산국화도 심그자, 싹이 나서 자라면, 이어, 붉은 꽃들이 피리니……
새로 푸른 동산에 금빛 새가 날아오고, 붉은 꽃밭에 나비 꿀벌떼가 날아 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섧게 흩어졌던 이웃들이 돌아오면, 너는 아아 그때 나와 얼마나 즐거우랴. 푸른 하늘, 푸른 하늘 아래 난만한 꽃밭에서, 꽃밭에서, 너는, 나와, 마주, 춤을 추며 즐기자. 춤을 추며, 노래하며 즐기자. 울며 즐기자.……어서 오너라.……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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