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 비를 다고
농민의 정서를 읊조림
사람만 다라워질 줄로 알았더니 필경에는 믿고 믿던 하늘까지 다라워졌다. 보리가 팔을 벌리고 달라다가 달라다가 이제는 곯아진 몸으로 목을 댓 자나 빠주고 섰구나!
반갑지도 않은 바람만 냅다 불어 가엾게도 우리 보리가 달증이 든 듯이 노랗다. 풀을 뽑느니 이랑에 손을 대 보느니 하는 것도 이제는 헛일을 하는가 싶어 맥이 풀려만 진다!
거름이야 죽을 판 살 판 거루어 두었지만 비가 안 와서―원수놈의 비가 오지 않아서 보리는 벌써 목이 말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렇게 한 장 동안만 더 간다면 그만― 그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구나!
하늘아 한 해 열두 달 남의 일 해주고 겨우 사는 이 목숨이 곯아 죽으면 네 맘에 시원할 게 뭐란 말이냐 제발 빌자! 밭에서 갈잎 소리가 나기 전에 무슨 수가 나 주어야 올해는 그대로 살아나가 보제!
더러운 사람놈의 세상에 몹쓸 팔자를 타고나서 살도 죽도 못해 잘난 이 짓을 대대로 하는 줄은 하늘아! 네가 말은 안 해도 짐작이야 못했것나 보리도 우리도 오장이 다 탄다 이러지 말고 비를 다고!
조선지광, 1928. 7
이상화 시인 / 빈촌의 밤
봉창 구멍으로 나른하여 조으노라 깜작이는 호롱불 햇빛을 꺼리는 늙은 눈알처럼 세상 밖에서 앓는다, 앓는다.
아, 나의 마음은, 사람이란 이렇게도 광명을 그리는가― 담조차 못 가진 거적문 앞에를, 이르러 들으니, 울음이 돌더라.
개벽 1925. 1
이상화 시인 / 서러운 해조(諧調)
하얗던 해는 떨어지려 하여 헐떡이며 피 뭉텅이가 되다.
새붉은 마음은 늙어지려 하여 곯아지며 굼벵이 집이 되다.
하루 가운데 오는 저녁은 너그럽다는 하늘의 못 속일 멍통일러라.
일생 가운데 오는 젊음은 복스럽다는 인간의 못 감출 설움일러라.
상화와 고월, 미발표, 1951
이상화 시인 / 선구자의 노래
나는 남 보기에 미친 사람이란다. 마는 내 알기엔 참된 사람이노라.
나를 아니꼽게 여길 이 세상에는 살려는 사람이 많기도 하여라.
오, 두려워라 부끄러워라. 그들의 꽃다운 사리가 눈에 보인다.
해여나 내 목숨이 있기 때문에 그 살림을 못 살까―아 죄롭다.
내가 알음이 적은가 모름이 많은가. 내가 너무나 어리석은가 슬기로운가.
아무래도 내 하고저움은 미친 짓뿐이라. 남의 꿀듣는 집을 문흘지 나도 모른다.
사람아 미친 내 뒤를 따라만 오너라 나는 미친 흥에 겨워 죽음도 뵈줄 테다.
월간 『開闢(개벽)』 192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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