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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상화 시인 / 비를 다고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1. 31.

이상화 시인 / 비를 다고

 

 

농민의 정서를 읊조림

 

사람만 다라워질 줄로 알았더니

필경에는 믿고 믿던 하늘까지 다라워졌다.

보리가 팔을 벌리고 달라다가 달라다가

이제는 곯아진 몸으로 목을 댓 자나 빠주고 섰구나!

 

반갑지도 않은 바람만 냅다 불어

가엾게도 우리 보리가 달증이 든 듯이 노랗다.

풀을 뽑느니 이랑에 손을 대 보느니 하는 것도

이제는 헛일을 하는가 싶어 맥이 풀려만 진다!

 

거름이야 죽을 판 살 판 거루어 두었지만

비가 안 와서―원수놈의 비가 오지 않아서

보리는 벌써 목이 말라 입에 대지도 않는다.

이렇게 한 장 동안만 더 간다면

그만― 그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구나!

 

하늘아 한 해 열두 달 남의 일 해주고 겨우 사는 이 목숨이

곯아 죽으면 네 맘에 시원할 게 뭐란 말이냐

제발 빌자! 밭에서 갈잎 소리가 나기 전에

무슨 수가 나 주어야 올해는 그대로 살아나가 보제!

 

더러운 사람놈의 세상에 몹쓸 팔자를 타고나서

살도 죽도 못해 잘난 이 짓을 대대로 하는 줄은

하늘아! 네가 말은 안 해도 짐작이야 못했것나

보리도 우리도 오장이 다 탄다 이러지 말고 비를 다고!

 

조선지광, 1928. 7

 

 


 

 

이상화 시인 / 빈촌의 밤

 

 

봉창 구멍으로

나른하여 조으노라

깜작이는 호롱불

햇빛을 꺼리는 늙은 눈알처럼

세상 밖에서 앓는다, 앓는다.

 

아, 나의 마음은,

사람이란 이렇게도

광명을 그리는가―

담조차 못 가진 거적문 앞에를,

이르러 들으니, 울음이 돌더라.

 

개벽 1925. 1

 

 


 

 

이상화 시인 / 서러운 해조(諧調)

 

 

하얗던 해는

떨어지려 하여

헐떡이며

피 뭉텅이가 되다.

 

새붉은 마음은

늙어지려 하여

곯아지며

굼벵이 집이 되다.

 

하루 가운데

오는 저녁은

너그럽다는 하늘의

못 속일 멍통일러라.

 

일생 가운데

오는 젊음은

복스럽다는 인간의

못 감출 설움일러라.

 

상화와 고월, 미발표, 1951

 

 


 

 

이상화 시인 / 선구자의 노래

 

 

나는 남 보기에 미친 사람이란다.

마는 내 알기엔 참된 사람이노라.

 

나를 아니꼽게 여길 이 세상에는

살려는 사람이 많기도 하여라.

 

오, 두려워라 부끄러워라.

그들의 꽃다운 사리가 눈에 보인다.

 

해여나 내 목숨이 있기 때문에

그 살림을 못 살까―아 죄롭다.

 

내가 알음이 적은가 모름이 많은가.

내가 너무나 어리석은가 슬기로운가.

 

아무래도 내 하고저움은 미친 짓뿐이라.

남의 꿀듣는 집을 문흘지 나도 모른다.

 

사람아 미친 내 뒤를 따라만 오너라

나는 미친 흥에 겨워 죽음도 뵈줄 테다.

 

월간 『開闢(개벽)』  1925. 5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1901년 대구(大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單調」, 「가을의 風景」, 「末世의 欷嘆」을 발표하며 등단.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 《개벽》誌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의 동인. 시인이며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권투 선수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