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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남수 시인 / 투창(投槍)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

박남수 시인 / 투창(投槍)

 

 

빈 하늘에 던져진

은빛의 창은

 

고구려의 벌판을 건너, 지금

서울의 꼭지에서

vie의 잔등을 노리고 있다.

 

고층 건물이 떨구는

한 장의 벽돌.

 

*

 

휘뜩,

창이 각도를 꺾는 순간에,

 

죽음은 멧돼지의 넓은 잔등에서

털을 세우고 피를 흘린다.

 

이윽고 조용히 굽는

순종의 다리가 던져져 있다.

 

*

 

누굴까,

빈 하늘로 쏘아 올리는

은빛의 창.

 

잔등은

누구나 시원(始源)의 벌에서

꽃같이 터지는 화약을 지고 있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한제 오화(閑題 五話)

 

 

음악(音樂)

 

내가 아지랑이 속에 있소. 어쩌면 요지경으로 조용한 들녘입니까. 말하자면 음악과 같은 것이지요. 복사나무는 복사나무의 작업을 하고, 배나무는 배나무의 작업을 하고…… 가시내사 가시내의 구실을 시키시구려. 푸른 열매를 먹으면 좀 조용도 해지리다.

 

무제(無題) 1

 

그저 한 귀가 모자라는 나날을 살다가 보면, ……푸면 다시 고이는 우물물처럼 충만한 게 부러워지오. 두레박으로 푸시지만 마시고, 가다가 하늘과 맞보는 충일로도 두어 주십시오, 제가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오늘은 참말 무엇으로 넘치고 싶으오.

 

무제(無題) 2

 

종달새는 어디까지 오르려나. 꺼질 듯 꺼질 듯 하늘로 점(點)져 가는 종달새는 하늘 그 너머가 보고 싶은가 보오. 나도 잠시면 지구를 좀 떠나 보고 싶소. 어쩌면 성층권쯤에서 가향(家鄕)이 그리워지고, 사람이 보고 싶어질는지도 모를 일이오.

 

기도(祈禱)

 

뺨이야 부빌 수 있습니다. 부둥켜안기사 더욱 쉽습니다. 그저 당신이 하듯이 사랑할 수가 도무지 없습니다. 내 가슴에 파묻혀 귀 기울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지키는 일만도 여간이 아닙니다.

 

―이런 이제의 마음을 잊지 않도록만이라도 해 주십시오.

 

한 모금의… 물

 

처녀야 물 한 모금만 다오. (한 바가지의 우물을 주었습니다.) 처녀야 네 웃음도 조금만 다오. (왠지 복사꽃의 그 부끄러움을……)

―모두 그렇고 그렇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매기 소묘(素描), 춘조사, 1958

 

 


 

 

박남수 시인 / 합승지점(合乘地點)

 

 

무교동에는 식품상 옆에

장의사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다.

(여기서 나는 합승을 탄다)

이승과 저승이 이웃한 곳에서

밤 열한시면,

취객들은 머뭇거리다가

일서(日書)집 앞에서 오줌을 갈긴다.

술집 색시들이 오리처럼 떼를 짓고

오리(汚吏)의 버르장머리를

낚우는 합승지점.

(재수가 좋으면 택시를 타고……)

내놓은 몸,

옆으로 가면 호텔이고

곧추 가면 사글세 방으로 간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 시인 / 해토(解土)

 

 

어둠의 자락을 헤치고

눈뜨는 물상들을 쓰다듬듯

바람은 소리가 되어

지붕에서 운다.

 

마른 풀잎이 서걱이고

나뭇가지는

가지를 몸 부비며

오만 가지가 움직이고 있다.

 

얼어붙은 것의 저변에는

강물이 흐르고(생동(生動)의 소리로 강물이 흐르고)

흐르는 강물의 소리에

고독의 소가 귀를 세운다.

 

다들 살아서들 있었는가.

긍정의 눈을 굴리며

소는 푸른 환각의 풀잎을 오늘도 되삭이고 있다.

 

눈이 뜨는 물상들은

조금씩 빛의 부분을 받으며

검게 옹이진 줄기에 근지러운 부스럼을 쓰고

등 부비듯 바람에 부비고 있다.

 

신의 쓰레기, 모음출판사, 1964

 

 


 

 

박남수 시인 / 호루라기의 장난

 

 

1

 

호루라기는, 가끔

나의 걸음을 멈춘다.

 

호루라기는, 가끔

권력이 되어

나의 걸음을 멈추는

어쩔 수 없는 폭군이 된다.

 

2

 

호루라기가 들린다.

찔끔 발걸음이 굳어져, 나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번에는 그 권력이 없었다.

다만 예닐곱 살의 동심이

 

뛰놀고 있을 뿐이었다.

속는 일이 이렇게 통쾌하기는

처음 되는 일이다.

 

새의 암장(暗葬), 문원사, 1970

 

 


 

 

박남수(朴南秀) 시인(1918.5.3-1994.9.17)

평양 출생. 숭실상고를 거쳐 1941년 일본 주오(中央)대학을 졸업. 초기에는 자연적 서경과 서정 속에서 절박한 감정을 은유적으로 환기하는 시를 썼으며, 후기에는 존재성을 규명하려는 주지적 경향을 가졌다.  유학 시절 제1회 <문장>지의 추천을 받은 김종한, 이용악 등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권유로 <문장>지에 투고하였는데,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정지용에게 추천됨.  1940년에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 "새의 암장(暗葬)"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시를 써 왔다. 미국에서 지낸 이국 생활의 외로움을 그린 <그리고 그 이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함. 1957년에는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94년 6월에는 조국 통일에의 절실한 심경을 노래한 시 "꿈의 물감"으로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공초(空超)문학상 (제2

회)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