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 쓰러져가는 미술관
어려서 돌아간 `인순'의 신령에게
옛 생각 많은 봄철이 불타오를 때 사납게 미친 모―든 욕망―회한을 가슴에 안고 나는 널 속을 꿈꾸는 이불에 묻혔어라
쪼각쪼각 흩어진 내 생각은 민첩하게도 오는 날 묵은 해 뫼너머 구름 위를 더우잡으며 말 못할 미궁에 헤맬 때 나는 보았노라
진흙 칠한 하늘이 나직하게 덮여 야릇한 그늘 끼인 냄새가 떠도는 검은 놀 안에 오 나의 미술관! 네가 게서 섰음을 내가 보았노라
내 가슴의 도장에 숨어 사는 어린 신령아! 세상이 둥근지 모난지 모르던 그날 그날 내가 네 앞에서 부르던 노래를 아직도 못 잊노라
크레오파트라의 코와 모나리자의 손을 가진 어린 요정아! 내 혼을 가져간 요정아! 가차운 먼 길을 밟고 가는 너야 나를 데리고 가라
오늘은 임자도 없는 무덤―쓰러져가는 미술관아 잠자지 않는 그날의 기억을 안고 안고 너를 그리노라 우는 웃음으로 살다 죽을 나를 불러라
상화와 고월, 미발표, 1951
이상화 시인 / 어머니의 웃음
날이 맛도록 온 데로 헤매노라― 나른한 몸으로도 시들푼 맘으로도 어둔 부엌에, 밥 짓는 어머니의 나보고 웃는 빙그레 웃음! 내 어려 젖 먹을 때 무릎 위에다, 나를 고이 안고서 늙음조차 모르던 그 웃음을 아직도 보는가 하니 외로움의 조금이 사라지고, 거기서 가는 기쁨이 비로소 온다.
월간 『開闢(개벽)』 1925. 1
이상화 시인 / 역천(逆天)
이때야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 같은 바람은 길을 끄으려 바래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 웃어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 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앞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야 지금 내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 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때와 어울려 한 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하게 지천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덩쿨같이 몇날 몇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시원, 1935. 4
이상화 시인 / 엿장수
네가 주는 것이 무엇인가? 어린애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짐승보다는 신령하단 사람에게 단맛 뵈는 엿만이 아니다 단맛 너머 그 맛을 아는 맘 아무라도 가졌느니 잊지 말라고 큰 가새로 목탁 치는 네가 주는 것이란 어째 엿뿐이랴!
월간 『開闢(개벽)』 1925. 5
|
'◇ 시인과 시(근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병기 시인 / 갈보리 외 3편 (0) | 2020.02.02 |
---|---|
이상화 시인 / 예지(叡智) 외 3편 (0) | 2020.02.02 |
박두진 시인 / 피닉스 외 5편 (0) | 2020.02.01 |
박남수 시인 / 투창(投槍) 외 4편 (0) | 2020.02.01 |
이상화 시인 / 비를 다고 외 3편 (0) | 2020.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