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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상화 시인 / 예지(叡智)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이상화 시인 / 예지(叡智)

 

 

혼자서 깊은 밤에 별을 보옴에

갓모를 백사장에 모래알 하나같이

그리도 적게 세인 나인 듯하여

갑갑하고 애닯다가 눈물이 되네.

 

만국부인, 1932. 10

 

 


 

 

이상화 시인 / 오늘의 노래

 

 

나의 신령!

우울(憂鬱) 헤칠 그날이 왔다!

나의 목숨아!

발악을 해 볼 그때가 왔다.

 

사천년이란 오랜 동안에

오늘의 이 아픈 권태 말고도 받은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랴,

시기에서 난 분열과 게서 얻은 치욕이나 열정을 죽였고

새로 살아날 힘조차 뜯어먹으려는―

관성이란 해골의 떼가 밤낮으로 도깨비 춤추는 것뿐이 아니냐?

아―문둥이의 송장 뼉다귀보다도 더 더럽고

독사의 삭은 등성이 뼈보다도 더 무서운 이 해골을

태워 버리자! 태워 버리자!

 

부끄러워라, 제 입으로도 거룩하다 자랑하는 나의 몸은

안을 수 없는 이 괴롬을 피하려 잊으려

선웃음치고 하품만 몇 해째 속에서 조을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쉴 사이 없이 울며 가는 자연의 변화가 내 눈에 내 눈에 보이고

`죽지도 살지도 않는 너는 생명이 아니다'란 내 맘의 비웃음까지 들린다 들린다

아 서리 맞은 배암과 같은 이 목숨이나마 끊어지기 전에

입김을 불어 넣자 핏물을 들여 보자.

 

묵은 옛날은 돌아보지 말려고 기억을 무찔러 버리고

또 하루 못 살면서 먼 앞날을 좇아가려는 공상도 말아야겠다.

게으름이 빚어낸 조을음 속에서 나올 것이란 죄 많은 잠꼬대뿐이니

오랜 병으로 혼백을 잃은 나에게 무슨 놀라움이 되랴,

애닯은 멸망의 해골이 되려는 나에게 무슨 영약이 되랴.

아 오직 오늘의 하루로부터 먼저 살아나야겠다.

그리하여 이 하루에서만 영원을 잡아 쥐고 이 하루에서 세기(世紀)를 헤아리려

권태를 부수자! 관성을 죽이자!

 

나의 신령아!

우울(憂鬱)을 헤칠 그날이 왔다.

나의 목숨아!

발악을 해 볼 그때가 왔다.

 

월간 『開闢(개벽)』  1925. 7

 

 


 

 

이상화 시인 / 원시적 읍울

 

 

방랑성을 품은 에매랄드 널판의 바다가 말없이 대였음이

묏머리에서 늦여름의 한낮 숲을 보는 듯―조으는 얼굴일러라.

짜증나게도 늘어진 봄날―오후의 하늘이야 희기도 하여라.

게선 이따금 어머니의 젖꼭지를 빠는 어린애 숨결이 날려 오도다.

사면(斜綿) 언덕 위도 쭈그리고 앉은 두어 집 울타리마다

걸어 둔 그물에 틈틈이 끼인 조개 껍질은 머―ㄹ리서 웃는 이빨일러라.

마을 앞으로 엎디어 있는 모래 길에는 아무도 없고나.

지난밤 밤 낚기에 나른하여―낮잠의 단술을 마심인가 보다.

다만 두서넛 젊은 아낙네들이 붉은 치마 입은 허리에 광주리를 달고

바다의 꿈 같은 미역을 거두며 여울목에서 여울목으로 건너만 간다.

잠결에 듣는 듯한 뻐꾸기의 부드럽고도 구슬픈 울음 소리에

늙은 삽사리 목을 뻗고 살피다간 다시 눈감고 조을더라.

나의 가슴엔 갈매기떼와 함께 수평선 밖으로 넘어가는 마음과

넋 잃은 시선―어느 것 보이지도 보려도 않는 물 같은 생각의 구름만 쌓일 뿐이어라.

 

월간 『開闢(개벽)』  1926. 3

 

 


 

 

이상화 시인 / 이별을 하느니

 

 

어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술이 떨어 말보다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 밤 우리 둘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타는 네 맘 속을 내 어이 모르랴.

 

애인아 하늘을 보아라 하늘이 까라졌고 땅을 보아라 땅이 꺼졌도다.

애인아 내 몸이 어제같이 보이고 네 몸도 아직 살아서 내 곁에 앉았느냐?

 

어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생각하며 사느니 차라리 바라보며 우는 별이나 되자!

 

사랑은 흘러가는 마음 위에서 웃고 있는 가비어운 갈대꽃인가.

때가 오면 꽃송이는 곯아지며 때가 가면 떨어졌다 썩고 마는가.

 

님의 기림에서만 믿음을 얻고 님의 미움에서만 외롬만 받을 너이었더냐.

행복을 찾아선 비웃음도 모르는 인간이면서 이 고행을 싫어할 나이었더냐.

 

애인아 물에다 물 탄 듯 서로의 사이에 경계가 없던 우리 마음 위로

애인아 검은 그림자가 오르락내리락 소리도 없이 어른거리도다.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나 되자!

 

오려무나, 더 가까이 내 가슴을 안아라 두 마음 한 가락으로 엮어 보고 싶다.

자그마한 부끄럼과 서로 아는 믿븜 사이로 눈감고 오는 방임을 맞이하자.

 

아 주름 잡힌 네 얼굴―이별이 주는 애통이냐 이별은 쫓고 내게로 오너라.

상아의 십자가 같은 네 허리만 더우잡는 내 팔 안으로 달려오너라.

 

애인아 손을 다고 어둠 속에도 보이는 납색의 손을 내 손에 쥐어 다고.

애인아 말해 다고 벙어리 입이 말하는 침묵의 말을 내 눈에 일러 다고.

 

어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우리 둘이 나뉘어 미치고 마느니 차라리 바다에 빠져 두 마리 인어로나 되어서 살자!

 

조선문단, 1925. 3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1901년 대구(大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單調」, 「가을의 風景」, 「末世의 欷嘆」을 발표하며 등단.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 《개벽》誌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의 동인. 시인이며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권투 선수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