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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갈보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이병기 시인 / 갈보리

 

 

옅은 구름 끼고 서리도 아니 내렸다

언덕 퍼런 숲에 새들은 지저귀고

그 밑엔 갈보리 잎이 소복소복 자란다

 

쓰일 듯 쓰일 듯하여 붓은 던질 수 없고

문장(文章)만으로 배는 채워지지 않는다

원컨대 오는 해마다 풍년(豊年)이나 드소서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고곰

 

 

몸이 한가로우매 도리어 병은 잦다

보던 글 더져 두고 상머리 홀로 누워

한 손을 이마에 대고 잔시름만 하도다

 

몸에 아픈 곳을 스스로 헬 수 없고

깃보다 가벼운 맘 허공으로 떠오르노니

흐릿한 별과 구름은 머리맡에 어르이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고서(古書)

 

 

더져 놓인 대로 고서(古書)는 산란(散亂)하다

해마다 피어 오던 매화(梅花)도 없는 겨울

한종일 글을 씹어도 배는 아니 부르다

 

좀먹다 썩어지다 하찮이 남은 그것

푸르고 누르고 천년(千年)이 하루 같고

검다가 도로 흰 먹이 이는 향은 새롭다

 

홀로 밤을 지켜 바라던 꿈도 잊고

그윽한 이 우주(宇宙)를 가만히 엿보고

빛나는 별을 더불어 가슴 속을 밝힌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 시인 / 공손수(公孫樹)

 

 

여기 한 거물(巨物)이 있다 갑오(甲午)는 물론 병자(丙子) 임진(壬辰)의 난(亂)을 모두 겪었다

 

만약 그 팔을 편다면 온 동내(洞內)가 그늘지고 똑바로 선다면 구름도 이마로 스쳐 가고 그저 소박(素朴) 장엄(莊嚴) 침묵(沈黙) 그려도 봄은 봄 가을은 가을로서 천지(天地)와 함께 늙지를 아니한다

 

내 마냥 그 앞을 지나면 절로 발을 적이고 고개도 아니 숙일 수 없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