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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두진 시인 / 피닉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1.

박두진 시인 / 피닉스

 

 

햇볕에 반짝이는 먼지

바닷가 자잘한 모래알에서도,

아직은 숨어 있는 흙 속의

풀뿌리

골짜기에 딩구는 희디 하얀 백골 속에서도

일어날 것이라 한다.

 

언제나 불안한 저들의 눈동자

피 묻은 옷자락

저절로 떨리는 머리카락 속에서도,

 

더럽게 엉기는 저들의 피톨

썩은 양심

죄의 손

거짓과 횡포와 살인을 기만하는

혓바닥 속에서도,

 

따습고 맑디 맑고 혁혁한 눈의 영원

불멸의 의의 부리

관용의 앞가슴

사랑의 뜨건 심장

죽일수록 살아나는 푸른 자유로

날개여,

 

어디나의 바람

어디나의 암흑

어디나의 죽음에서 푸득푸득 날개 쳐

영원 다시 불멸의 넋

일어날 것이라 한다.

 

수석열전(水石列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하나씩의 별

 

 

하나씩의 별들이 죽어가고 있다.

아픔의 피로 지는

침묵(沈黙)들의 낙엽(落葉),

아무도 오늘을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더러는 서서 울고

더러는 이미 백골(白骨)

헛되이 희디 하얀 백일(百日)만

벌에 쬐는

하나씩의 순수(純粹)의 영겁(永劫)의

넋의 분노(憤怒)

 

벌판을 치달리던

맹수(猛獸)들의 살륙(殺戮),

그 턱의 뼈도 흐트러져

하얗게 울고 있다.

 

사도행전(使徒行傳), 일지사, 1973

 

 


 

 

박두진 시인 / 하지절(夏至節)

 

 

한나절 산중 첩첩 휘파람새 운다.

 

햇살 펑펑 쏟아지고,

칡넝쿨, 댕댕이 다래 넝쿨, 머루 넝쿨 칭칭 감고,

 

골짜기 푸섶에 떨어진 여름의 시 한 구절,

 

어려워서 외다 외다 뻐꾹새 그냥 날아가고,

그 휘파람새, 황금새도 와서 읽다 어려워 그냥 날아가고,

 

전라의 알몸뚱이

 

해죽해죽 달아나며 유혹하는 너

마구마구 쓰러뜨려 가슴 덮친다.

 

더덕냄새 박하냄새 암노루냄새 난다.

뭉개지는 젖과 땀, 이글대는 눈의 꿈,

 

아니, 바람냄새 출렁대는 바다냄새 난다.

미역냄새 홍합냄새 그 흡반냄새 난다.

 

몸뚱어리 몸뚱어리

배암 친친 굽이 틀고,

 

한나절내 산중 첩첩 꽃비 흥건하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박두진 시인 / 항아리

 

 

길어 내리는, 길어 내리는,

하늘 가득 먼 푸름 항아리배여.

입술 갓을 빨고 가는

따스한 햇볕,

알맞은 보픈 배의

자랑스러움이어.

오랜 날 타 내려온 그리움에 익은

가슴 닿는 꽃익임의 향그러운 젖 흐름

아, 아기 낳자. 아기 낳자.

하늘 배임이어.

길어 안은 하늘 속의

햇덩어리여.

 

거미와 성좌(星座), 대한기독교서회, 1962

 

 


 

 

박두진 시인 / 화비명(花碑銘)

 

 

하나씩의 꽃잎이 떨어질 때

두들기는 땅의 울림은 천둥이다.

하나씩의 꽃잎이 절벽에 부딪쳐 떨어질 때

먼 하늘의 별들도 하나씩

하늘가로 떨어지고,

떨어질 때 켜지는 별들의 빛난 등불

별들이 흘리는 은빛 피

떨어져나온 별들의 자욱에 새겨지는 푸른 이름

그것은 넋의 씨다.

떨어지는 꽃과 별

별과 꽃이 윙윙대는

날개의 불사조

죽어도 살아나는 불씨

죽여도 죽지 않는 승리

죽일수록 살아나는 영원한 불사조다.

 

야생대(野生代), 일조각, 1977

 

 


 

 

박두진 시인 / 흙과 바람

 

 

흙으로 빚어졌음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리.

바람으로 불어 넣이었음 마침내

바람으로 돌아가리.

멀디 먼 햇살의 바람 사이

햇살 속 바람으로 나부끼는 흙의 티끌

홀로서 무한 영원

별이 되어 탈지라도

말하리.

말할 수 있으리.

다만 너

살아 생전

살의 살 뼈의 뼈로 영혼 깊이 보듬어

후회 없이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고.

 

박두진 전집, 범조사, 1983

 

 


 

박두진[朴斗鎭, 1916.3.10 ~ 1998.9.16] 시인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誌를 통해 등단. 박목월, 조지훈과 함께 3인 합동시집 『靑鹿集(청록집)』(을유문화사, 1946)을 간행한 뒤 첫 개인시집 『해』를 출간. 이후 『오도』, 『거미와 성좌』, 『인간밀림』, 『고산식물』, 『사도행전』, 『수석열전』, 『속 수석열전』, 『야생대』, 『포옹무한』, 『빙벽을 깬다』 등의 시집과 시론집 『시와 사랑』, 『한국현대시론』 등을 간행. 3.1문화상 예술상, 인촌상, 지용문학상, 외솔문학상, 동북아기독문학상 등을 수상. 연세대에서 정년퇴임 후 단국대와 추계예대에서 후학 양성. 1998년에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