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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상화 시인 / 이중의 사망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3.

이상화 시인 / 이중의 사망

― 가서 못 오는 박태원의 애틋한 영혼에게 바침

 

 

죽음일다!

성낸 해가 이빨을 갈고

입술은 붉으락 푸르락 소리 없이 훌쩍이며

유린당한 계집같이 검은 무릎에 곤두치고 죽음일다.

 

만종의 소리에 마구를 그리워하는 소―

피난민의 마음으로 보금자리를 찾는 새―

다아 검은 농무 속으로 매장이 되고

천지는 침묵한 뭉텅이 구름과 같이 되다!

 

`아, 길 잃은 어린 양아, 어디로 가려느냐.

아, 어미 잃은 새 새끼야, 어디로 가려느냐.'

비극의 서곡을 리프레인하듯

허공을 지나는 숨결이 말하더라.

 

아, 도적놈의 죽일 숨쉬듯한 미풍에 부딪혀도

설움의 실패꾸리를 풀기 쉬운 나의 마음은

하늘 끝과 지평선이 어둔 비밀실에서 입맞추다

죽은 듯한 그 벌판을 지나려 할 때 누가 알랴.

어여쁜 계집의 씹는 말과 같이

제 혼자 지즐대며 어둠에 끓는 여울은 다시 고요히

농무에 휩싸여 맥 풀린 내 눈에서 껄떡이다.

 

바람결을 안으려 나부끼는 거미줄같이

헛웃음 웃는 미친 계집의 머리털로 묶은―

아, 이 내 신령의 낡은 거문고 줄은

청철(靑鐵)의 옛 성문으로 닫힌 듯한 얼빠진 내 귀를 뚫고

울어들다 울어들다 울다는 다시 웃다―

악마가 야호(野虎)같이 춤추는 깊은 밤에

물방앗간의 풍차가 미친 듯 돌며

곰팡 슬은 성대로 목메인 노래를 하듯……!

 

저녁 바다의 끝도 없이 몽롱한 머―ㄴ 길을

운명의 악지바른 손에 끄을려 나는 방황해 가는도다,

남풍(嵐風)에 돛대 꺾인 목선과 같이 나는 방황하는도다.

 

아, 인생의 쓴 향연에 불림 받은 나는 젊은 환몽 속에서

청상의 마음 위와 같이 적막한 빛의 음지에서

추거를 따르며 장식(葬式)의 애곡을 듣는 호상객처럼―

털 빠지고 힘 없는 개의 목을 나도 드리고

나는 넘어지다―나는 꺼꾸러지다!

 

죽음일다!

부드럽게 뛰노는 나의 가슴이

주린 빈랑(牝狼)의 미친 발톱에 찢어지고

아우성치는 거친 어금니에 깨물려 죽음일다!

 

백조, 1923. 9

 

 


 

 

이상화 시인 / 이 해를 보내는 노래

 

 

「가뭄이 들고 큰물이 지고 불이 나고 목숨이 많이 죽은 올해이다. 조선 사람아 금강산에 불이 났다 이 한 말이 얼마나 깊은 묵시인가. 몸서리쳐지는 말이 아니냐. 오 하나님―사람의 약한 마음이 만든 도깨비가 아니라 누리에게 힘을 주는 자연의 영정인 하나뿐인 사람의  예지―를 불러 말하노니 잘못 짐작은 갖지 말고 바로 보아라 이 해가 다 가기 전에―조선 사람의 가슴마다에 숨어 사는 모든 하나님들아!」

 

하느님! 나는 당신께 돌려보냅니다.

속썩은 한숨과 피젖은 눈물로 이 해를 싸서

웃고 받을지 울고 받을지 모르는 당신께 돌려보냅니다.

당신이 보낸 이 해는 목마르던 나를 물에 빠져 죽이려다가

누더기로 겨우 가린 헐벗은 몸을 태우려도 하였고

주리고 주려서 사람끼리 원망타가 굶어죽고 만 이 해를 돌려보냅니다.

하느님! 나는 당신께 묻조려 합니다.

땅에 엎드려 하늘을 우러러 창 잡은 손으로

밉게 들을지 섧게 들을지 모르는 당신께 묻조려 합니다.

당신 보낸 이 해는 우리에게 `노아의 홍수'를 갖고 왔다가

그날의 `유황불'은 사람도 만들 수 있다 태워 보였으나

주리고 주려도 우리들이 못 깨쳤다 굶어 죽였던가 묻조려 합니다.

아, 하느님!

이 해를 받으시고 오는 새해 아침부턴 벼락을 내려 줍소

악도 선보담 더 착할 때 있음을 아옵든지 모르면 죽으리라.

 

월간 『開闢(개벽)』  1926. 3

 

 


 

 

이상화 시인 / 저무는 놀 안에서

― 노인(勞人)의 구고를 읊조림

 

 

거룩하고 감사론 이동안이

영영 있게시리 나는 울면서 빈다.

하루의 이동안―저녁의 이동안이

다만 하루만치라도 머물러 있게시리 나는 빈다.

 

우리의 목숨을 기르는 이들

들에서 일깐에서 돌아오는 때다.

사람아 감사의 웃는 눈물로 그들을 씻자.

하늘의 하나님도 쫓아낸 목숨을 그들은 기른다.

 

아 그들의 흘리는 땀방울이

세상을 만들고 다시 움직인다.

가지런히 뛰는 네 가슴 속을 듣고 들으면

그들의 헐떡이던 거룩한 숨결을 네가 찾으리라.

 

땀 찬 이마와 맥 풀린 눈으로

괴론 몸 움막집에 쉬러 오는 때다.

사람아 마음의 입을 열어 그들을 기리자

하느님이 무덤 속에서 살아 옴에다 어찌 견주랴.

 

거룩한 저녁 꺼지려는 이동안에 나 혼자 울면서 노래 부른다.

사람이 세상의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시리 나는 노래 부른다.

 

조선지광, 1928. 7

 

 


 

 

이상화 시인 / 조선병(朝鮮病)

 

 

어제나 오늘 보이는 사람마다 숨결이 막힌다.

오래간만에 만나는 반가움도 없이

참외꽃 같은 얼굴에 선웃음이 집을 짓더라.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 맛도 없이

고사리 같은 주먹에 진땀물이 굽이치더라.

서하늘에다 봉창이나 뚫으랴 숨결이 막힌다.

 

월간 『開闢(개벽)』  1926. 1

 

 


 

이상화 [李相和, 1901.4.5~1943.4.25] 시인

1901년 대구(大邱)에서  출생.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경성 중앙학교에서  수학. 1921년 『백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單調」, 「가을의 風景」, 「末世의 欷嘆」을 발표하며 등단. 일본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어 및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 《개벽》誌를 중심으로 시·소설·평론 등을  발표하고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에 가담.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의 동인. 시인이며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 교육자, 권투 선수로도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