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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병기 시인 / 광릉(光陵)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3.

이병기 시인 / 광릉(光陵)

 

 

깊고 깊은 뫼이 숲도 그리 그윽하다

빤히 트인 곳이 저 아니 광릉(光陵)인가

허울한 양마석(羊馬石) 머리 지는 해는 잦았다

 

외롭고 쓸쓸하기 영월(寧越)과 어떠하리

해마다 봄이 오면 자규(子規)야 울지마는

오르고 눈물을 지을 누대(樓臺) 하나 없도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괴석(怪石)

 

 

그 얼굴 그 모양을 누가 탐탁타 하리

앞뒤로 돌보아도 연연한 곳이 없고

그 속은 얼음과 같이 차고 담백하도다

 

차고 담백함을 누가 귀엽다 하리

다만 헌신같이 초개(草芥)에 버렸으니

때묻고 이지러짐이 저의 탓은 아니로다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구름

 

 

새벽 동쪽 하늘 저녁은 서쪽 하늘

피어나는 구름과 그 빛과 그 모양을

꽃이란 꽃이라 한들 그와 같이 고우리

 

그 구름 나도 되어 허공에 뜨고 싶다

바람을 타고 동(東)으로 가다 서(西)으로 가다

아무런 자취가 없이 스러져도 좋으리

 

가람시조집, 문장사, 1939

 

 


 

 

이병기 시인 / 그리운 그날 1

 

 

병아리 어미 찾아 마당가에 뱅뱅 돌고

시렁 위 어린 누에 한잠을 자고 날 때

누나는 나를 데리고 뽕을 따러 나가오

 

누나는 뽕을 따고 집으로 돌아가도

금모래 은모래 쥐었다 놓았다 하고

나 혼자 밭머리 앉아 해 지는 줄 모르오

 

소나기 삼형제(三兄第)가 차례로 지나가고

언덕 밑 옹달샘에 무지개 다리 노면

선녀들 머리 감으러 나려옴을 바라오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이병기(李秉岐) 시인 / 1891∼1968

호: 가람(伽藍). 시조 시인. 국문학자. 전북 익산에서 출생. 1913년에 관립 한성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보통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전념하였다.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이래 현대 감각의 시조로 침체된 시조 문학을 크게 일으켰다. 193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을 거쳐 1935년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이 되었고, 그 후에<가람 시조집>을 발표, 자연의 생생한 묘사를 통하여 현대 시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42년에는<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여 동안 복역하다가 석방된 후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면서 고문헌 연구에 몰두하였다. 광복 후 상경하여 미군정청 편찬과장,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그 해 백철과 공저

로 <국문학 전사>를 간행하였다. 그는 현대 자유시에 압도된 시조의 부흥에 큰 공헌을 하였고, 저서에는 <국문학 개론> <가람 문선>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