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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구황룡(九黃龍)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3.

박목월 시인 / 구황룡(九黃龍)

 

 

날가지에 오붓한

진달래꽃을

 

구황룡 산길에

금실 아지랑이

 

―풀섶 아래 꿈꾸는 옹달샘

―화류장롱 안쪽에 호장저고리

―새색시 속눈썹에 어리는 이슬

 

날가지에 오붓한

꿈이 피는

 

구황룡 산길에

은실 아지랑이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박목월 시인 / 귀 밑 사마귀

 

 

잠자듯 고운 눈썹 위에

달빛이 나린다

눈이 쌓인다

옛날의 슬픈

피가 맺힌다

어느 강(江)을 건너서

다시 그를 만나랴

살눈섭 길씀한

옛 사람을

 

산(山)수유꽃 노랗게

흐느끼는 봄마다

도사리고 앉힌 채

도사리고 앉힌 채

울음 우는 사람

귀 밑 사마귀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인 / 그저

 

 

어슬어슬한

초봄 해 질 무렵

팔짱을 끼고

주막 툇마루에

입술이 퍼렇게 앉았는 것은

그저 앉았음.

기다릴 것도

안 기다릴 것도 없이

나무 가지는

움을 마련하고

추위에 돌아 앉은 산(山)

골짜기에 살아나는 봄빛

꼭지에 놀.

글썽거려지는 눈물은

그저 글썽거려짐.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기계(杞溪) 장날

 

 

아우 보래이.

사람 한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큰둥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같이 기계(杞溪) 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앙 그렁가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목발 받쳐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 시인 / 난초 잎새

 

 

난초 잎새에 밤이 무르익는다.

난초의 존재, 잎새의 묵상.

동양적인 정신의 잎새에 무르익는

밤의 심도(深度).

나는 혼자다.

오늘밤 월세계로 달리는 로키트의 궤적이

난초 잎새에 어린다.

난초는 차라리 무료(無聊)하다.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난초는 무엇이냐, 나는 무엇이냐.

허막한 공간. 바람에 씻기는 한 덩이 유성 위에서

나의 내부에 돋아나는 난초

밤을 응시하는 난초의 눈, 잎새의 눈,

난초는 차라리 무료(無聊)하다.

차라리 수묵색(水墨色).

나는 혼자다.

 

-<경상도의 가랑잎> 민중서관, 1968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