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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목월 시인 / 감람나무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2. 2.

박목월 시인 / 감람나무

 

 

어린 감람나무여.

주께서

몸소 거닐으신

갈릴리

축복받은 땅에

주의

발자국이 살아 있는

바닷가으로

안수를 받으려고

고개를 숙인 나무여

세상에는

감람나무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자라고 있지만

그들의

뒤통수에

머물어 있는

주의

크고 따뜻한 손.

세상의

모든 수목은

하나님의 뜻으로

자라나지만

어린 감람나무여

어린 감람나무여

주의 말씀으로 태어난

순결한 핏줄로

지금

환하게 웃는

어린이들 입에 물리는

오월의

금빛 열매여!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박목월 시인 / 갑사댕기

 

 

안개는 피어서

강(江)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인 / 개안(開眼)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신(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신(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복(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신(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신(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박목월 시인 / 겨울 선자(扇子)

 

 

오전에는

제자의 주례를 보아 주고

오후에는

벼루에 먹을 간다.

이제

난(蘭)을 칠 것인가, 산수(山水)를 그릴 것인가.

흰 종이에

번지는 먹물은 적막하고.

가슴에 붉은 꽃을 다는 것과

흰 꽃을 꽂는 것이

잠깐 사이다.

겨울 부채에

나의 시(詩),

나의 노래,

진실은 적막하고

번지는 먹물에 겨울해가 기운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구름밭에서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다래 머루 넌출은

바위마다 휘감기고

풀섶 둥지에

산새는 알을 까네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산 넘어서

우는 비둘기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박목월[朴木月, 1915.1.6~1978.3.24] 시인

본명은 영종(泳鍾). 1916년 경상남도 고성(固城)에서 출생하여 경상북도 경주(慶州)에서 자람. 1935년 대구 계성(啓聖)중학 졸업. 정지용(鄭芝溶)에 의해 1939년 문예지 《문장(文章)》에 시가 추천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청록집(靑鹿集)』(3인시), 『경상도가랑잎』, 『사력질(砂礫質)』, 『무순(無順)』 등과 수필집으로 『구름의 서정』, 『밤에 쓴 인생론(人生論)』 그밖의 저서로는 『문학의 기술(技術)』, 『실용문장대백과(實用文章大百科)』 등이 있음. 1953년 홍익대학교 조교수, 1961년 한양대학교 부교수 및 1963년 교수, 1965년 대한민국 예술원(藝術院) 회원,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3년 시전문지 『심상(心像)』의 발행인, 1976년 한양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역임. 자유문학상, 5월문예상, 서울시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 1978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