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시인 / 감람나무
어린 감람나무여. 주께서 몸소 거닐으신 갈릴리 축복받은 땅에 주의 발자국이 살아 있는 바닷가으로 안수를 받으려고 고개를 숙인 나무여 세상에는 감람나무보다 더 많은 어린이들이 자라고 있지만 그들의 뒤통수에 머물어 있는 주의 크고 따뜻한 손. 세상의 모든 수목은 하나님의 뜻으로 자라나지만 어린 감람나무여 어린 감람나무여 주의 말씀으로 태어난 순결한 핏줄로 지금 환하게 웃는 어린이들 입에 물리는 오월의 금빛 열매여!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박목월 시인 / 갑사댕기
안개는 피어서 강(江)으로 흐르고
잠꼬대 구구대는 밤 비둘기
이런 밤엔 저절로 머언 처녀들……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갑사댕기 남끝동 삼삼하고나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박목월 시인 / 개안(開眼)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신(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신(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지복(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신(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신(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크고 부드러운 손, 영산출판사, 1979
박목월 시인 / 겨울 선자(扇子)
오전에는 제자의 주례를 보아 주고 오후에는 벼루에 먹을 간다. 이제 난(蘭)을 칠 것인가, 산수(山水)를 그릴 것인가. 흰 종이에 번지는 먹물은 적막하고. 가슴에 붉은 꽃을 다는 것과 흰 꽃을 꽂는 것이 잠깐 사이다. 겨울 부채에 나의 시(詩), 나의 노래, 진실은 적막하고 번지는 먹물에 겨울해가 기운다.
무순(無順), 삼중당, 1976
박목월 시인 / 구름밭에서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구름밭에 우는 비둘기
다래 머루 넌출은 바위마다 휘감기고 풀섶 둥지에 산새는 알을 까네
비둘기 울듯이 살까보아 해종일 산 넘어서 우는 비둘기
산도화(山桃花), 영웅출판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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