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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기원 시인 / 기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6.

송기원 시인 / 기도

 

 

제 몸뚱어리도 이제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영혼이 아니고 바로 썩은 몸뚱어리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사랑을 받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스스로 한번도 아껴본 적이 없는 몸뚱어리지만, 지금 왜 이리 소중해지는지요.

숨가쁜 어느 골목에서는 썩은 몸뚱어리마저 없이, 갈증에 죽어가는 이가 있을 것만 같아요.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달

 

 

"그대를 사랑한다 다짐하던 말

그대 앞에 웃음짓던 얼굴

그대를 향해 내밀던 손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와 함께 나누자던 죽음

모두 모두 거짓입니다."

 

일흔이 넘은 빨간딱지 노인이

창살에 목매어 자살한 밤에

차마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못해

창살에 걸려 있는 달을 향해 토해냈더니

달은 다만 휘영청 밝은 달빛으로

내 오장육부는 물론 거짓까지 꿰뚫어

토해낸 나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동백꽃 필 때

 

 

달빛 가득한 거문도의 밤에는

부두 뒷골목 낙원정 색시들만 노래 부르는 게 아니리.

 

이 밤 따라 얄궂게 목소리가 떨리고

가슴을 더듬는 뱃사람 손길도 거칠지 않아

 

가슴 속에 쌓여 있던 무엇인지

자꾸만 자꾸만 넘쳐난다 싶을 때

 

달빛 가득한 뒷동산 동백숲에는

기어코 꽃봉오리가 터쳐나는 노래, 노래들!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宋基元) 시인, 소설가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복기의 노래〉와 같은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경외성서(經外聖書)>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소설집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와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와 시집으로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등이 있음. 1983 제2회 신동엽 문학상. 1993 제24회 동인문학상. 2001 제9회 오영수문학상. 2003 제6회 김동리문학상. 2003 제11회 대산문학상.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