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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기형도 시인 / 늙은 사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6.

기형도 시인 / 늙은 사람

 

 

그는 쉽게 들켜 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 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 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 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입 속의 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대학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왔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 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물 속의 사막

 

 

밤 세 시, 길 밖에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 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 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 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바람의 집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우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 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 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 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奇亨度, 1960.2.16 ~ 1989.3.7]  시인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에서 근무.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울한 자신의 과거 체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독특하게 표현하는 시를 썼다. 1989년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 유고시집으로 시집 『입속의 검은 입』(문학과지성사 1989)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