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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3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6.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3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 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던지자 방안 가득 눈이 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문 뒤에서 나를 데려다준 승강기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릴 뿐 바람도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기 아직도 펼쳐져 있는 하얀 이불 능선 속에서 찬 기운이 뭉클 올라옵니다 일시에 몸에서 열이 다 달아납니다 모두 흰눈 뿐입니다 형광등 불을 켜자 흡사 냉장고 속 같습니다 몸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솟아오릅니다 비닐 종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습니다 한 발자국 내딛자 얼음 바람이 가슴 속까지 들어옵니다 방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찬바람 풀무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콧속에 성에가 낍니다 온몸이 그을려 급기야는 뻣뻣해진 황소 같은 저 검은 소파까지 몇만 킬로? 발이 떼어지지 않습니다 주저앉아서 방바닥을 만져봅니다 그 동안 얼마나 눈이 온 걸가? 바닥은 너무 차갑게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허파도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몸 속에서 얼어붙은 허파를 날카로운 칼로 쓰윽 그어보는가봅니다 딱딱한 돌 속에서 숨을 길어올리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눈을 감습니다 눈거풀 내려오는 소리가 창문을 쾅 닫는 소리보다 크게 들립니다 얼음 벽이 다가오는 걸까요? 얼음 벽에 걸린 손목도 점점 얼어붙습니다 누군가 내게 얼음 조끼를 입혀 놓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숨쉴 수 없게 되었을 때 감은 눈 속으로, 얼음 위를 번지며 녹는 물처럼 그대가 들어옵니다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에 들어온 그대는 내가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멀리 있는 그대가 내게로 보낸 것입니까? 눈쌓인 바닥이 갑자기 솜처럼 푸근해집니다 잠들면 죽는다 내 안의 누군가 나를 흔들어대지만 얼음 눈꺼풀 너무 뜨겁습니다 감은 몸 속 방 안이 더 뜨거워지려 합니다 가방을 베고 얼음 능선 위에 모로 드러눕습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4

 

 

나는 자리를 뜹니다…… 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하루 종일 한 폭의 그림 사이로 한마디 말이 떠다닙니다 싱싱한 창에 불같이 뜨거운 뺨을 문지르고 싶습니다 싸늘한 바다였습니다 바닷속에는 더 싸늘한 우물이 깊었습니다 그 우물 곁에 낮은 집들이 잠들어 깊은 물 밖, 밤하늘로 잠꼬대를 송출중이었습니다 싸늘한 나무들이 파도에 몸을 떨었습니다 얼음 같이 찬 우물에 몸을 던지고싶었습니다 인적 없는 골목길, 그 골목길에 어두운 피가 돌돌돌 흘렀습니다……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낮은 집들마다 높은 안테나가 매달렸습니다 안테나 끝은 바닷물을 넘었을까? 그 보이지 않는 안테나 끝에서……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나는 꺼풀이요 그대는 심장입니다 아무것도 담아두려 하지 않는 주머니, 심장이 쿵쿵 뜁니다 꺼풀 속에서 끓어오르기도 합니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지요?……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의자 두 개, 하루 종일 내가 번갈아 앉습니다 블라인드 쳐진 방안, 내 모든 핏길이 그리로 뛰어들지만, 아무것도 담아놓지 않은 길 한 뭉치, 심장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2002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2000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