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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3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 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던지자 방안 가득 눈이 쌓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문 뒤에서 나를 데려다준 승강기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릴 뿐 바람도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기 아직도 펼쳐져 있는 하얀 이불 능선 속에서 찬 기운이 뭉클 올라옵니다 일시에 몸에서 열이 다 달아납니다 모두 흰눈 뿐입니다 형광등 불을 켜자 흡사 냉장고 속 같습니다 몸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솟아오릅니다 비닐 종이라도 뒤집어쓰고 싶습니다 한 발자국 내딛자 얼음 바람이 가슴 속까지 들어옵니다 방안 어딘가 보이지 않는 찬바람 풀무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콧속에 성에가 낍니다 온몸이 그을려 급기야는 뻣뻣해진 황소 같은 저 검은 소파까지 몇만 킬로? 발이 떼어지지 않습니다 주저앉아서 방바닥을 만져봅니다 그 동안 얼마나 눈이 온 걸가? 바닥은 너무 차갑게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습니다 숨을 쉴 수 없습니다 허파도 얼어붙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몸 속에서 얼어붙은 허파를 날카로운 칼로 쓰윽 그어보는가봅니다 딱딱한 돌 속에서 숨을 길어올리는 것처럼 힘이 듭니다 눈을 감습니다 눈거풀 내려오는 소리가 창문을 쾅 닫는 소리보다 크게 들립니다 얼음 벽이 다가오는 걸까요? 얼음 벽에 걸린 손목도 점점 얼어붙습니다 누군가 내게 얼음 조끼를 입혀 놓은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숨쉴 수 없게 되었을 때 감은 눈 속으로, 얼음 위를 번지며 녹는 물처럼 그대가 들어옵니다 하얀 블라인드 쳐진 방안에 들어온 그대는 내가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멀리 있는 그대가 내게로 보낸 것입니까? 눈쌓인 바닥이 갑자기 솜처럼 푸근해집니다 잠들면 죽는다 내 안의 누군가 나를 흔들어대지만 얼음 눈꺼풀 너무 뜨겁습니다 감은 몸 속 방 안이 더 뜨거워지려 합니다 가방을 베고 얼음 능선 위에 모로 드러눕습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4
나는 자리를 뜹니다…… 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 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하루 종일 한 폭의 그림 사이로 한마디 말이 떠다닙니다 싱싱한 창에 불같이 뜨거운 뺨을 문지르고 싶습니다 싸늘한 바다였습니다 바닷속에는 더 싸늘한 우물이 깊었습니다 그 우물 곁에 낮은 집들이 잠들어 깊은 물 밖, 밤하늘로 잠꼬대를 송출중이었습니다 싸늘한 나무들이 파도에 몸을 떨었습니다 얼음 같이 찬 우물에 몸을 던지고싶었습니다 인적 없는 골목길, 그 골목길에 어두운 피가 돌돌돌 흘렀습니다……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낮은 집들마다 높은 안테나가 매달렸습니다 안테나 끝은 바닷물을 넘었을까? 그 보이지 않는 안테나 끝에서……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나는 꺼풀이요 그대는 심장입니다 아무것도 담아두려 하지 않는 주머니, 심장이 쿵쿵 뜁니다 꺼풀 속에서 끓어오르기도 합니다 어떻게 안으로 들어가지요?……그건 네 길이지 내 길은 아니야……나는 의자에서 일어납니다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의자 두 개, 하루 종일 내가 번갈아 앉습니다 블라인드 쳐진 방안, 내 모든 핏길이 그리로 뛰어들지만, 아무것도 담아놓지 않은 길 한 뭉치, 심장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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