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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동토(凍土)
내 가슴 동토(凍土) 위에 시베리아 찬바람이 살을 에인다.
말라빠져 엉켜 뒹구는 잡초(雜草)의 밭 쓰레기 구덩이엔 입 벌린 깡통, 밑 나간 레이션 박스, 찢어진 성조기(星條旗), 목 떨어진 유리병, 또 한구석엔 총(銃) 맞은 삽살개 시체(屍體), 전차(戰車)의 이빨자국이 난 밭고랑엔 말라뻐드러진 고양이의 잔해(殘骸),
저기 비닐 온상(溫床) 같은 천막(天幕) 앞 피 묻은 바짓가랑이가 걸린 철망(鐵網) 안을 오가며 양키 병정(兵丁)이 휙휙 휘파람을 불면 김치움 같은 땅속에서 노랗고 빨갛고 파란 원색(原色)의 스카프를 걸친 계집애들이 청개구리처럼 고개를 내민다.
하늘이 갑자기 입에 시꺼먼 거품을 물고 갈가마귀떼들이 후다닥 날아 찌푸린 산을 넘는데
나의 잔등의 미칠 듯한 이 개선(疥癬)― 나의 가슴을 치밀어 오르는 이 구토(嘔吐)― 어느 누구를 향한 것이냐?
까마귀, 홍익사, 1981
구상 시인 /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 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어려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빠삐용! 그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걸세.
* 드레퓌스의 벤취: 앙리 샤리에르의 탈옥 수기 `빠삐용'에 나오는 죽음의 섬의 벼랑에 있는 벤취로, 유태 출신 프랑스 육군 대위로 반역죄에 몰려 이 섬에 유형되었다가 12년 만에 복권된 드레퓌스의 이름을 딴 것임.
** 짱: 주인공의 탈출을 돕고도 죽음의 섬에 그대로 남는 중국계 도형수(徒刑囚)의 이름.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4
구상 시인 / 말씀의 실상(實相)
영혼의 눈에 끼었던 무명(無明)의 백태가 벗어지며 나를 에워싼 만유일체(萬有一切)가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노상 무심히 보아오던 손가락이 열 개인 것도 이적(異蹟)에나 접하듯 새삼 놀라웁고
창밖 울타리 한구석 새로 피는 개나리꽃도 부활(復活)의 시범(示範)을 보듯 사뭇 황홀합니다.
창창(蒼蒼)한 우주(宇宙), 허막(虛莫)의 바다에 모래알보다도 작은 내가 말씀의 신령한 그 은혜로 이렇게 오물거리고 있음을 상상도 아니요, 상징(象徵)도 아닌 실상(實相)으로 깨닫습니다.
말씀실상(實相),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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