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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두석 시인 / 교과서와 휴전선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5.

최두석 시인 / 교과서와 휴전선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는 아니라 하지만

천차만별 중구난방인 학생들 마음에

고루 스미도록

교단에서 진실 말하려면

얼마나 하염없는 인내가 필요한가

윤선생은 오래 기다리다 결국

교원노조 운동으로 교단 떠날 요즘에야

다음처럼 수업준비 하였다

 

먼저 묻는다

왜 한강에 배가 들지 않느냐고

강이 깊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구에 휴전선이 그어졌기 때문이라는

확실한 목소리 들으려면

스무 고개 넘어야 하리라

 

임진강 만나 밀물로 역류하다

썰물 타고 굽이치는 한강, 강물에

보이지 않는 휴전선 있듯

밤낮 붙들고 씨름하는 교과서에도

휴전선 그어져 있다고 말한다

독재 권력이 독재 유지 위해 설치한

교과서 속 지뢰밭

앞으로의 숙제로 찾아보라고 말한다

 

교과서에서 통일은 어떻게 될 수 있나

물어보라, 물어보고 침묵의 혹은

거짓의 완강한 벽을 느꼈을 때

그것이 휴전선이라고 말한다

허구한 날 사지선다형 문제에

쳇바퀴 돌리는 다람쥐로

청춘을 갇혀 있게 하는 것

그것이 휴전선이라고 말한다

 

교과서 만든 교육 개발원은

남아도는 미국의 밀가루와

옥수수 차관으로 수립되었고

사지선다형 문제는

차관으로 미국 유학 간 자들이

수입해 왔다고 말한다

휴전선 만든 주범은 미국이지만

휴전선 뚫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반짝이는 혹은 의아해하는

눈빛 온몸으로 느끼며

이런 말 하는 선생을

수상쩍게 보는 놈 있다면

녹슨 철모 뒤집어쓴 그의 머리에도

휴전선 그어져 있다고 말한다.

 

물망초꽃밭, 1991

 

 


 

 

최두석 시인 / 김통정

 

 

팔만대장경 옻빛 관목을 시리게 들여다보다가 잠든 밤 꿈 속에서 솟구친 나의 욕망은 서남해안을 흰 돛배로 헤매더니 파도 건너 제주도 애월면 고성리, 청상과부집 장독 밑에서 지렁이로 꿈틀거렸다.

 

지렁이는 꿈틀거림으로 뭉클뭉클 자라나서 어느 날 문풍지에 스미는 달빛을 타고 과부의 방을 침범했다. 억센 불가항력의 사내로

 

여자의 허리가 굵어질수록 새벽과 더불어 사라지는 사내의 행방이 궁금했다.

하룻밤은 궁금의 긴 실오라기 끝 바늘을 사내의 옷깃에 꿰었다.

 

다음날 사내는 장독 밑에서 커다란 지렁이로 죽어 있었다. 누리의 흙을 붉게 적시면서…… (그런지 몇 달 후 여자는 온몸에 비늘 돋친 아이를 낳았다. 이름은 김통정)

 

물망초꽃밭, 1991

 

 


 

최두석(崔斗錫, 1956 ~ ) 시인

문학 평론가. 전남 담양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대꽃'(1984), '성에꽃'(1990), '꽃에게 길을 묻는다'(2003) 등이 있다. 강릉대학교(현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1991~1997)를 거쳐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1997~)로 재직하면서,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07년 제2회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제3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7년 제2회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제3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