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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 시인 / 거진 밤바다
등짐장수 석삼년에 고향도 잊어 남해 바닷가 홀로 된 어미도 잊어 깨보시장수 석현이 눈보다 먼저 마음이 젖네 싸락눈 내리는 거친 밤바다
떠돌이 장동무들 추렴 술판 푸짐한 노랫가락 속에 몸을 던져도 고향노래 옛노래 목이 잠겨도 너나없이 캄캄한 섣달 그믐 돌아보면 숨가쁘게 쫓겨온 길만 가득해 싸락눈 내리는 거진 밤바다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겨울편지
1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가등(街燈)의 불빛들이 턱 밑에까지 기어 오른 어둠을 향해 더 이상 눈 부릅뜨지 않기 위하여 온 밤을 깜박이고 있을 때 삼십 촉짜리 흐린 전등이 겨우살이 땅짐승과도 같은 목숨을 밝혀주는 곳에 돌아와 저는 즐거웠습니다.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는 자의 마음과 그러한 육체에는 소리 사나운 바람도 머물지 않고 밤이 깊어갑니다.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분한 사랑때문에 그대는 이 시대의 긴 겨울밤을 추워하는가요.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착한 체온을 빼앗기는가요. 웅웅 우는 바람이 저를 뚫고 지난들 차라리 구멍이야 뚫릴 뿐, 아무런 아픔도 없는 구멍이야 뻥뻥 뚫릴 뿐 즐거워하는 저를 보세요. 오늘도 즐거웠습니다.
2
아직도 인육시장이 있고, 포악한 군주가 있고, 죄수를 불태워 죽이는 나라는 얼마나 즐거울까요. 그런 나라의 인육시장에서 노예가 되고, 포악한 군주의 신하가 되고, 불에 타죽는 죄수가 되기를 꿈꾸는 저는 얼마나 즐거울까요. 겨울 밤에는 먼 나라의 우화를 읽고, 쉽게 잠들고, 만화 같은 잠꼬대를 하면서 저는 얼마나 즐거울까요. 달빛 속에 차거운 정신들이 수없이 일어서서 저를 나부끼게 한들, 곧고 바른 말들이 빙판에서 온밤을 쩡쩡 터쳐난들 노예가 되고, 간언을 하며, 우화나 읽으면서 저는 얼마나 즐거울까요.
말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저의 혀라도 자르겠습니다. 보지 않기 위해서라면 저의 눈알도 후벼내겠습니다. 손발도 묶고 그대가 언짢아하는 저의 얼굴마저 지우겠습니다. 그러나 그대를 두렵게 하는 저의 심장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찢고 또 찢은들 붉은 꽃잎과도 같이 저의 생명 전부를 물들여 버리는 심장만은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그림자에 대해서
누님. 저는 다시 저의 말을 떠나보냅니다. 더 이상 소생의 믿음도 없이 단 한번 화려한 말발굽 소리도 없이 저 어두운 벌판으로 저의 말을 떠나보냅니다. 이제 막 눈뜨는 솔숲의 어린 가지들마저도 어떤 예감으로 소스라쳐 우는 밤입니다. 먼 곳의 사람들은 불을 끄고 잠이 들었습니다.
누님. 서른 언저리의 나이에는 그림자만이 아름답습니다. 몇 개의 야산을 남겨 두고 더 이상 바다에는 다가가지 않아요. 바다의 그림자만으로 바다를 봅니다. 구름, 비, 해, 눈, 달……모든 사물들이 그림자만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림자를 떨구며 숲에서는 새가 죽습니다. 누님. 만일 저의 말이 단 한 번 화려하게 울음을 운다면 그것은 그림자때문입니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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