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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 시인 / 그 집 앞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 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기억할 만한 지나침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 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 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기형도 시인 /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 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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