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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1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5.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1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둘이 앉아 있다

설탕을 나르던 스푼이 잠깐 흔들리고

군청색 보자기 덮인 탁자 위로 설탕이 쏟아진다

밤하늘 납작한 은하수처럼

 

블라인드 쳐진 방은 두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누를 수 있다 이 책엔 블라인드

쳐진 방이 양면에 걸쳐 실려 있다

왼쪽 페이지 상단에 볼펜으로 점을

하나 찍고 그 못에 벗은 옷을 갖다 건다

나 혼자만 드나들던 옷이 거기 걸려 있다

그곳으로부터 금을 그어 나와 오른쪽

페이지에 닿게 하고 또 거기에 무엇을 걸까

머리가 빠진 모자가 바람도 안 부는데

책장 앞에서 흔들거린다

또,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에 걸쳐 있는

마룻바닥에 알 수 없는 동그란 점을 하나 찍어 본다

그 점이 거기 있으므로 왠지 빈 방에 구멍 뚫린 듯하다

바늘 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흔들리고

오른쪽 페이지 하단 쪽으로 커피가 쏟아진다

블라인드 쳐진 방이 뜨겁게 젖는다

벽 위에서 뜨거운 커피가 줄줄 쏟아져 내려오다

내 머리칼을 다 적신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2

 

 

형광등 불빛을 받은 어항 여덟이 긴 나무 탁자 둘레를 빙 둘러싸고 놓여 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어항들이 불빛을 받아 번쩍번쩍 한다

난 크리스탈이야 한 어항의 빛이 여덟 갈래로 흩어진다 이 토론에서 그는 언제나 주도적이다

의자 뒤에 붙은 등받이, 그 등받이 높이 매달린 어항

내 바로 앞 어항의 붕어 두 마리는 붉게 충혈돼 있다

그러나 그 붕어의 눈동자 둘은 흰 재 앉은 듯 흐릿하다

늦게 도착한 어항이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흰 재 앉은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이내 다시 반쯤 감겨진다

저쪽 대각선 그어서 반대편 쪽 등받이 앞에서

무료한 손이 나와 파란 연필로 탁자를 탁탁 친다

그러다 그 어항에서 붕어 두 마리가 떨어진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나만 그 비린내에 몸서리치나

붕어 두 마리가 탁자 중간에서 헤엄을 멈춘다

내 어항의 붕어 두 마리도 그곳쯤에서 멈춘다 둘의 시선이 탁자의 중간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붕어 네 마리가 탁자 중간을 더듬고 있다

몸을 떠난 붕어 네 마리가 탁자 중간에서 물이 없어요 퍼드덕거리다 이내 잠잠하다

휘발성 붕어! 두 사람의 시선이 황급히 거두어진다

토론의 진행자가 잠시 침을 삼키는 사이 안경 속의 붕어를 빛내며 한 어항이 빳빳해진다 그 어항이 외친다

그는 그 상황에서 왜 미리 자살하지 않았을까요 낡은 트렁크처럼 목숨을 질질 끌고 그 스페인 국경 산중까지 가야만 했을까요 나 같으면 미리 죽어 버렸을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의 어항을 돌린다 어쩌다 붕어 네 마리가 마주친다

잠시 후 저쪽 대각선 그어서 반대쪽 등받이 앞에서 파란 연필을 놓은 오른손이 올라와 어항의 밑바닥을 받친다

기울어진 어항의 물이 자칫 쏟아질 것만 같다

검은 머리칼 다발이 출렁 하고, 안경이 콧등까지 미끄러진다

어항의 뺨 위로 보이지 않는 두 줄기 물이 흘러 내린다

붕어 두 마리 감겨지고 물 새는 어항이 더 숙여진다 위태하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2002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2000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