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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1
블라인드 쳐진 창 아래 둘이 앉아 있다 설탕을 나르던 스푼이 잠깐 흔들리고 군청색 보자기 덮인 탁자 위로 설탕이 쏟아진다 밤하늘 납작한 은하수처럼
블라인드 쳐진 방은 두 손바닥으로 납작하게 누를 수 있다 이 책엔 블라인드 쳐진 방이 양면에 걸쳐 실려 있다 왼쪽 페이지 상단에 볼펜으로 점을 하나 찍고 그 못에 벗은 옷을 갖다 건다 나 혼자만 드나들던 옷이 거기 걸려 있다 그곳으로부터 금을 그어 나와 오른쪽 페이지에 닿게 하고 또 거기에 무엇을 걸까 머리가 빠진 모자가 바람도 안 부는데 책장 앞에서 흔들거린다 또,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에 걸쳐 있는 마룻바닥에 알 수 없는 동그란 점을 하나 찍어 본다 그 점이 거기 있으므로 왠지 빈 방에 구멍 뚫린 듯하다 바늘 구멍에 황소바람 들어온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흔들리고 오른쪽 페이지 하단 쪽으로 커피가 쏟아진다 블라인드 쳐진 방이 뜨겁게 젖는다 벽 위에서 뜨거운 커피가 줄줄 쏟아져 내려오다 내 머리칼을 다 적신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블라인드 쳐진 방 2
형광등 불빛을 받은 어항 여덟이 긴 나무 탁자 둘레를 빙 둘러싸고 놓여 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어항들이 불빛을 받아 번쩍번쩍 한다 난 크리스탈이야 한 어항의 빛이 여덟 갈래로 흩어진다 이 토론에서 그는 언제나 주도적이다 의자 뒤에 붙은 등받이, 그 등받이 높이 매달린 어항 내 바로 앞 어항의 붕어 두 마리는 붉게 충혈돼 있다 그러나 그 붕어의 눈동자 둘은 흰 재 앉은 듯 흐릿하다 늦게 도착한 어항이 빈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흰 재 앉은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이내 다시 반쯤 감겨진다 저쪽 대각선 그어서 반대편 쪽 등받이 앞에서 무료한 손이 나와 파란 연필로 탁자를 탁탁 친다 그러다 그 어항에서 붕어 두 마리가 떨어진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나만 그 비린내에 몸서리치나 붕어 두 마리가 탁자 중간에서 헤엄을 멈춘다 내 어항의 붕어 두 마리도 그곳쯤에서 멈춘다 둘의 시선이 탁자의 중간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붕어 네 마리가 탁자 중간을 더듬고 있다 몸을 떠난 붕어 네 마리가 탁자 중간에서 물이 없어요 퍼드덕거리다 이내 잠잠하다 휘발성 붕어! 두 사람의 시선이 황급히 거두어진다 토론의 진행자가 잠시 침을 삼키는 사이 안경 속의 붕어를 빛내며 한 어항이 빳빳해진다 그 어항이 외친다 그는 그 상황에서 왜 미리 자살하지 않았을까요 낡은 트렁크처럼 목숨을 질질 끌고 그 스페인 국경 산중까지 가야만 했을까요 나 같으면 미리 죽어 버렸을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의 어항을 돌린다 어쩌다 붕어 네 마리가 마주친다 잠시 후 저쪽 대각선 그어서 반대쪽 등받이 앞에서 파란 연필을 놓은 오른손이 올라와 어항의 밑바닥을 받친다 기울어진 어항의 물이 자칫 쏟아질 것만 같다 검은 머리칼 다발이 출렁 하고, 안경이 콧등까지 미끄러진다 어항의 뺨 위로 보이지 않는 두 줄기 물이 흘러 내린다 붕어 두 마리 감겨지고 물 새는 어항이 더 숙여진다 위태하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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