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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시인 / 한복(韓服) 1
한복은 맨살의 부드러움이다 조선의 안으로부터 묻어 오는 온화(溫和)하고도 미끈한 빛깔. 가래침을 뱉고 싶은 거리에서 무명도포(道袍)를 걸치는 일은 몇십배나 더 속이 후련하다. 푸른 하늘처럼 붙는 감촉이란 입술에 물린 젖가슴보다 푸짐하다. 요즘은 섹스에 달관(達觀)한 노인(老人)들만이 의젓하게 입고 다닌다고 하지만 혁명(革命)을 겪어본 사람은 한번쯤은 한복을 입어 보라. 정신을 휘감고 흔들리는 곡선(曲線)은 잔물결 많은 이조시대(李朝時代) 추사(秋史) 김정희의 붓끝이라 해도 어찌 시늉이나 하겠느냐. 넉넉한 바짓말을 추스를 때 등줄기가 환해지는 고적감은 자유(自由)의 어쩔 수 없는 약점이다. 지금은 정서(情緖)의 절정에 매달린 단 한벌의 한복을 입기 위하여 시골로 장가들려고 애를 쓰고 밤중에도 장롱의 열쇠를 비틀며 할아버지의 한복을 몰래 빼내려는 혁명(革命)적인 장난은 너무나 서글프다 한복을 훔쳐서라도 입으려는 내 알몸의 소원은 암담할 뿐이다. 늘 남의 옷을 벗고 입었기에 암담할 뿐이다.
참깨를 털면서, 창작과비평사, 1977
김준태 시인 / 항아리
흙으로 빚은 항아리―
구멍나기 전에는 모든 것을 비우고, 때로는 모든 것을 가득 채운다 무서운 진리(眞理)이다!
칼과 흙, 문학과지성사, 1989
김준태 시인 / 흐르는 소리는 살아 있음인가
강물소리도 멀고 파도소리도 멀고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철판 다리 밑으로 썩은 물이라도 흐르는 소리를 들으니 내 아주 좋아라 연탄재와 똥물과 기름덩이가 서로 부둥켜 안고 썩은 물이라도 되어 돌멩이를 때리며 흐르는 소리를 내지르니 내 아주 좋아 죽겠어라 거리마다 뭇 마음들이 앞뒤에 쐐기를 박으며 절벽을 이루어 갈 때 강물소리가 먼 세상― 썩은 물이라도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것이 서럽도록 좋고 좋아라.
국밥과 희망, 풀빛, 1984
김준태(金準泰 ,1948년 7월 10일~) 시인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소재로 광주를 예수와 불사조라고 노래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1면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신문은 당시 신군부 계엄에 의해 검열 되어 '아아 광주여' 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당시 시인은 고교 교사로 재직했을 때인데, 저항시를 신문에 게재한 탓에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강제 해직당하기도 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보름째 되는 날, 1980년 6월 1일 아침의 일이다. 광주 전남고등학교 독일어 교사로 있던 시인 김준태(金準泰, 1948~ )는 『전남매일신문』 편집국장 대리로 있던 소설가 문순태의 전화를 받는다.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까지 시 한 편을 써서 신문사로 나오라는 말. 시인은 아내와 두 아이를 밖으로 내보내고 단칸 셋방에서 한 시간 남짓 만에 109행이나 되는 시를 무엇에 홀린 듯이 단번에 써낸다. 이렇게 쓴 시를 신문사 편집국에 전달하고 김준태는 그날부터 23일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잠행한다. 그 뒤로 시인은 교직에서 해직되고, 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해 수박 장사에 나서기도 한다. 이런 곡절이 배어 있는 시가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다.
1980년 『전남매일신문』에 「아아, 광주여 우리 나라의 십자가여!」를 발표해 ‘5월 광주’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떠오른 김준태는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토박이 ‘전라도 촌놈’이다. 그는 조선대부속고등학교를 거쳐 조선대학교 사범대 독어교육과를 졸업한다. 그는 1969년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에 각각 「재기」 · 「이 봄의 교향악」이 당선되고, 또 시인 조태일이 펴내던 『시인』에 「시작(詩作)을 그렇게 하면 되나」 · 「아메리카」 · 「신 김수영(新金洙暎)」 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나선다. ‘목요시’ 동인으로 활동하며 한결같이 “희망의 시, 삶의 시”를 추구해온 시인은 지금까지 『참깨를 털면서』(1977) ·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1981) · 『국밥과 희망』(1983) · 『넋통일』(1986) ·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1988) · 『불이냐 꽃이냐』(1989) · 『칼과 흙』(1989) ·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1994) 등의 시집을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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