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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노경(老境)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5.

구상 시인 / 노경(老境)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도락(道樂)으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不滅)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4

 

 


 

 

구상 시인 / 달밤 2경(景)

 

 

1

 

달이 으슥한 우물 안에서

철렁철렁 목욕을 하다

두레박을 타고 올라와

질옹배기로 흘러들어간다.

 

이번엔 햇바가지에 담겨

새댁의 검은 머리채 위서부터

보얀 등허리와 볼록한 앞가슴을

미끄러져 내려

 

빨랫돌 위에 산산히 부서진다.

 

달로 씻은 육신(肉身)은 달처럼 희다….

 

노란 지붕 위에서

내려다보던 고추들이

얼굴을 더욱 붉힌다.

 

어느새 중천(中天)에 다시 올라간

달을 쳐다보고

박덩이가 쩔쩔매며

넝쿨 뒤로 숨는다.

 

꽃밭에서 이를 바라보던 봉선화가

너무나 재밌어 꽃잎을 떨구며

눈에 이슬을 단다.

 

2

 

강에 달이 둥실.

 

강낭밭에 그림자가 바삭 버석.

 

마당의 코스모스가 너울 너울.

 

뒤란의 장독대가 빙.

 

지붕 위에 박넝쿨이 살살.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독락(獨樂)의 장(章)

 

 

얘들아, 내가 노니는 여기를

매화 옛 등걸에

까치집이라 하자.

 

늬들은 나를 환희(幻戱)에 산다고

기껏 웃어주지만

나에게는 어느 영웅보다도

에누리없는 사연이 있다.

 

이제 나도 세월도

서로 무심해지고

눈 아래 일렁이는 세파(世波)도

생사(生死)의 소음(騷音)도

설월(雪月) 같은 은은(殷殷) 속에

화해(和解)된 유정(有情)!

 

얘들아!

박명(薄明), 저 가지에 걸치는 서광(曙光)과

모혼(暮昏)의 정적(靜寂)을 생식(生食)하면서

운명(運命)을 정서(情緖)로 응감(應感)시킨

내사 갖는 이 즐거움이야

늬들은 모르지.

 

도도(陶陶)한 이 아픔을

늬들은 모르지.

 

구상문학선, 1975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