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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 / 새의 나라
모란순(牡丹筍)이 새의 몸짓을 하고 시냇물이 새의 울음을 운다. 모두가 새를 닮아간다. 큰 별이 하나 꽃밭 같은 은하수를 밀고 가다가 새가 되어 날았다. 행방불명이 된 누나와 빌딩과 수상(首相), 그리고 광화문 네거리의 빈 리어카. 누구는 역전(驛前)의 육십 계단(六十 階段)을 오르다가 누구는 무교동 사잇길을 걷다가 공작이 학(鶴)이 비둘기 제비 멧새가 되었다는 얘기 강물처럼 넘실거리고, 일 년쯤 늦게사 돌아온 석조(石棗)꽃. 나무도 사람도 차(車)도 날아오르고 싶으면 모두 새가 되었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생각하는 나무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똘히 사유한다 보이지 않는 지맥(地脈)에까지 어쩔 수 없는 몸부림을 전한다 안으로 지닌 생명의 그지없는 중량을 가뜩히 느껴 본다 받들어 숨쉬는 하늘과 구름과… 산새의 무게를 균형(均衡)해 본다 먼 불안의 방황에서 돌아오듯 이제 숨막히는 긴장을 푼다 한 잎 두 잎 목숨을 떨어뜨린다 가볍고 서운한 안으로 충만해 오는 희열(喜悅)이 있다 가지를 휘감아 올리는 비상(飛翔)의 흐느낌이 있다 발가벗은 채, 나무는 귀를 기울여본다
황홀, 세계문화사, 1956
문덕수 시인 /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
선(線)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線)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線)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線)이 뛰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찬란한 꽃 망사(網紗) 위에 동그만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공간, 성문각,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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