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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 시인 / 놀부전
아니 볼 수 없다. 오장 칠보를 논두렁에 구멍 뚫기, 패는 곡식 이삭 자르기 말리는 놈 밀어 놓고 발꿈치로 탕탕 차기 결국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흥부의 박은 다시 열리지 않는다 놀부의 성질이 고쳐진 것도 아니다 흥부 재산 가로채 부자가 되고 나자 왈짜패는 새삼 몰려들어 충성을 맹세하고 그가 탄 마지막 박에서 나온 개똥은 나라 곳곳에 즐비하다
흥부야, 곤장 품팔이 가는 흥부야 네 눈동자 속에 나타나 보인다 잔디밭에서 무참히 끌려 간 친구의 얼굴이.
물망초꽃밭, 1991
최두석 시인 / 농섬
황사바람 뿌옇게 부는 토요일, 고온리 사람들 창자 울리는 푹격기 폭음 들리지 않는 날이다. 고온리를 쿠니로 들은 양키들, 이른바 쿠니 사격장이 쉬는 날이다. 며칠전 `사격장을 아메리카로'라고 외치며 철조망을 넘어가 과녁 위에 누웠던 주민들 몇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고 시위 재발 대비해 사격장 한 켠에 백골단 진치고 있는 날이다. 그래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휴일에만 출입할 수 있는 드 넓은 갯벌에는 도요새 게구멍을 파고 남정네들 낙지를 잡고 아낙네들 조개를 캔다. 물 들면 물살에 몸을 적시다가 썰물 때면 갯벌 위로 떠오르는 섬. 온갖 바다새 물새 알 낳아 품던 무성한 숲은 신기루가 되고 이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벌거숭이 섬. 농섬에서 쇳덩이를 캐는 사람도 있다. 섬에 쏟아지는 하고많은 폭탄, 폭탄이 박아 놓은 쇳덩이다. 육이오 때부터 폭격이 그치지 않는 농섬. 필리핀이나 괌의 미군기까지 날아와 전쟁연습하는 농섬. 폭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지며 새삼 식민지가 무엇인지 묻는 농섬. 너를 귀머거리 벙어리라 여기며 등 돌리는 자 누구인가. 너의 간절한 외침 파도 소리에 실려 오는데 귀에 말뚝 박고 태극기를 높이 흔드는 자 누구인가.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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