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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사월 초파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8.

김혜순 시인 / 사월 초파일

 

 

영화는 기적처럼 잔인한 것. 우리는 어두워진 방안에서 텅 빈 하얀 공간에 대해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앉아 있다 ―프랭크 오하라, 레다의 영상

 

저 아카시아 흐드러지게 터진 골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노고단

지붕마다 사람들이 위태롭게

올라서서 수만 깃발처럼 펄럭거리네

 

엄숙하고 경건한 장례 행렬 거대한 영정 뒤로 상복을 입은 가족을 실은 검은 승용차 얘야 얘야 못 간다 에미 애비 놔두고 네 맘대로 못 간다 입이 있으면 대답을 해라 이놈아 이 불효 막심한 놈아 수천 개의 휘날리는 만장들 뒤를 이어 대오를 지은 수만 명의 조문객들 검은 리본을 단 연도의 시민들 이곳을 주검이 통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나리오대로 길을 막는 방석모 방패 삼십 분 안에 행렬을 돌리지 않으면 최루탄 발사하겠습니다 걔는 안 죽었어 이놈들아 한정 없이 살 거야

 

땡볕 아래 한없는 대치 아스팔트에 앉거나 눕는 행렬 장기전이 될 거야 그 사이로 김밥장수 커피장수 마스크를 파는 사람 사는 사람 치약을 짜 바닥에 글씨를 쓰는 사람 물을 사먹는 사람 시루떡을 팔러 온 할머니의 양은 다라이 죽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셔츠를 파는 사람 사 입은 사람 햄버거를 까먹는 가게의 처녀 아울러 김밥과 콜라를 먹는 조문객들 저녁 시간이야 흐트러지는 대오 그 사이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 껌을 파는 아이들 신문을 파는 청년들 그 신문으로 모자를 접는 여학생들 두둑해진 전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담배장수 시장보다 김밥 값이 두 배야 바가지야 여기가 해수욕장이냐 그 사이로 성스런 초파일의 연등 행렬 등장 낭랑한 반야심경 합장 어스름 해지는 것과 때를 맞추어 최루탄 발사

 

흐트러지는 대오 뛰는 아가씨의 벗겨지는 하이힐 우는 아이 탱탱 드럼통처럼 구르며 뜨거운 커피를 아스팔트 위에 쏟는 보온 물통 그걸 잡으려 뛰는 커피장수 밟히는 콜라 깡통 터진 김밥을 밟는 구두 골목으로 잠입하는 대오 두건을 쓴 사람들의 백 미터 이백 미터 달리기 어디서 물 쏟아지는 소리 깨어지는 떡시루 장삼을 펄럭이며 혹은 연등을 들고 혹은 연등을 버리고 뛰는 중들 연등 위로 넘어지는 옥색 한복 뜯기는 자주 옷고름 노랑 저고리에 붙는 불을 탁탁 손으로 치며 우는 여고생 연등을 밟는 검은 버선 전속력으로 우회하는 검은 지프

 

큰일이 나긴 난 모양이야 저 연기

바람 따라 퍼질 때마다

눈발이 땅에서 하늘로 솟아오르네

설악 대폭설 때처럼 저 나방떼

흩어지는 저 나방떼

모든 아카시아들 하나씩 매단

조등(弔燈) 아래로 달려드는 저 나방떼

먹으러 달려드는 저 새떼 먹으러

하늘 검게 칠하며 돌처럼 달려드는

저 자동차떼

막혔다 터져 흐르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서울의 밤

 

 

몇 개의 산맥을 타넘어야

네게 이를 수 있니

불개미 한 마리가

플라스틱 장미 꽃잎을

한잎 한잎 타넘어가고 있다

 

몇 십 개의 계단을 올라야

잠든 너를 깨울 수 있니

저 혼자 불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몸으로 두근거리는 내가

잠든 너의 몸 속을

한밤중 소리도 없이 오르고 있다

 

어떻게 등불을 빨아먹을 수 있니

나방이 한 마리

혓바닥을 바늘처럼 곤두세우고

한밤내 가로등을 찔러보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신기루(蜃氣樓)

 

 

한 방(房) 건너고, 두 방(房) 건너서

사람들이 돌아온다.

불개미 한 마리에 불개미 한 마리가 얹혀서

사각사각 사람들이 돌아온다.

잠시 수그려 보면

여기서 소리들은 잦아들고

잦아드는 소리마다 은밀한 불꽃이 튀긴다.

 

    마디발 곤충(昆蟲)이 마디발 언어(言語)를 낳고,

    마디발 곤충(昆蟲)을 낳고, 낳고, 나을 때

    문 밖에 서 계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방(房) 건너고 두 방(房) 건너서

    누가 아직도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선 새도록 당나귀들이 떠나고

붉은 꽃 샐비어 지는 향기 하늘 높다지만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 바삐바삐 이 방(房)에서 이 방(房)으로

건너 다니기만 할 때 나는 듣는다.

네가 부르던 외마디 가엾은 노래.

 

또 다른 별에서, 문학과지성사, 1981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2002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2000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