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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수치(羞恥)
창경원(昌慶苑) 철책(鐵柵)과 철망(鐵網) 속을 기웃거리며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을 찾고 있다.
여보, 원정(園丁)! 행여나 원숭이의 그 빨간 엉덩짝에 무슨 조짐이라도 없소?
혹시는 곰의 연신 핥는 발바닥에나 물개의 수염에나 아니면 잉꼬 암놈 부리에나 무슨 징후라도 없소?
이 도성(都城) 시민에게선 이미 퇴화(退化)된 부끄러움을 동물원에 와서 찾고 있다.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아가는 지금
아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 무엇을 듣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저 히라동굴에서 마호메트가 알라의 계시를 전해받듯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
저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나자렛 예수 머리 위에서 울리던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
저 가야산 숲속 보리수 아래 석가모니가 정각에 든 순간의 그런 생각에 취해 있다.
아니 아가는 그도 저도 아닌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인류의 오직 하나만의 존재로서 자기만이 싹을 틔우고 꽃 피워야 할 그 누구도 보도 듣도 생각도 못한 그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다.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 시인 / 에로스 소묘(素描)
1
농익은 수밀도(水密桃)가슴.
꽃무덤 위에 취해 쓰러진 나비.
메론 향기의 혀.
흰 이를 드러낸 푸른 파도에 자맥질하는 갈매기.
수평선의 아득한 눈 속.
원시림 속의 옹달샘을 마시는 노루.
에로스의 심연(深淵), 원죄(原罪)의 미(美).
2
호롱 하롱 고양이의 요기(妖氣) 서린 얼굴.
삼단 머리채로 휘감은 비너스의 목.
명주(明紬) 젖가슴에 솔개의 발톱자국.
모래시계의 배꼽.
함지박 엉덩이, 아름드리 나무 속살 허벅지.
랑데부 여울목 불지른 봄날의 잔디 두덩.
어둠의 태백(太白) 속
진달래산 담요벼랑 아래
출렁이는 백포(白布)의 파도 위 양팔을 포승(捕繩)으로 조이는 나부(裸婦).
……
비둘기 울음.
숨막히는 찰나(刹那), 오오 비의(秘義)!
3
허공에 새긴다.
그 얼굴 그 목소리 그 미소 그 허벅지
허지만 그 정은 새길 수가 없다.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형상(形象)이 안 된다.
4
그 알몸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흰 수염을 쓰다듬는다.
백금(白金)같이 바래진 정념(情念)…
그 사랑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제 그 시간과 공간은 영원에 이어졌다.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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