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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수치(羞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8.

구상 시인 / 수치(羞恥)

 

 

창경원(昌慶苑)

철책(鐵柵)과 철망(鐵網) 속을 기웃거리며

부끄러움을 아는

동물을 찾고 있다.

 

여보, 원정(園丁)!

행여나 원숭이의

그 빨간 엉덩짝에

무슨 조짐이라도 없소?

 

혹시는 곰의 연신 핥는

발바닥에나

물개의 수염에나

아니면 잉꼬 암놈 부리에나

무슨 징후라도 없소?

 

이 도성(都城) 시민에게선

이미 퇴화(退化)된

부끄러움을

동물원에 와서 찾고 있다.

 

구상문학선, 1975

 

 


 

 

구상 시인 / 아가는 지금

 

 

아가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다.

무엇을 듣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

 

저 히라동굴에서 마호메트가

알라의 계시를 전해받듯

그런 현상을 보고 있다.

 

저 요단강변에서 세례를 받는

나자렛 예수 머리 위에서 울리던

그런 소리를 듣고 있다.

 

저 가야산 숲속 보리수 아래

석가모니가 정각에 든 순간의

그런 생각에 취해 있다.

 

아니 아가는 그도 저도 아닌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인류의 오직 하나만의 존재로서

자기만이 싹을 틔우고 꽃 피워야 할

그 누구도 보도 듣도 생각도 못한

그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혼자서 빙그레 웃고 있다.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 시인 / 에로스 소묘(素描)

 

 

1

 

농익은 수밀도(水密桃)가슴.

 

꽃무덤 위에 취해 쓰러진

나비.

 

메론 향기의 혀.

 

흰 이를 드러낸 푸른 파도에

자맥질하는 갈매기.

 

수평선의 아득한 눈 속.

 

원시림 속의 옹달샘을 마시는

노루.

 

에로스의 심연(深淵),

원죄(原罪)의 미(美).

 

2

 

호롱 하롱 고양이의 요기(妖氣) 서린

얼굴.

 

삼단 머리채로 휘감은

비너스의 목.

 

명주(明紬) 젖가슴에 솔개의 발톱자국.

 

모래시계의 배꼽.

 

함지박 엉덩이,

아름드리 나무 속살 허벅지.

 

랑데부 여울목

불지른 봄날의 잔디 두덩.

 

어둠의 태백(太白) 속

 

진달래산 담요벼랑 아래

 

출렁이는 백포(白布)의 파도 위

양팔을 포승(捕繩)으로 조이는

나부(裸婦).

 

……

 

비둘기 울음.

 

숨막히는 찰나(刹那), 오오 비의(秘義)!

 

3

 

허공에 새긴다.

 

그 얼굴

그 목소리

그 미소

그 허벅지

 

허지만 그 정은

새길 수가 없다.

마음 속에 새겨진 것은

형상(形象)이 안 된다.

 

4

 

그 알몸을 어루만지던

손으로

흰 수염을 쓰다듬는다.

 

백금(白金)같이 바래진 정념(情念)…

 

그 사랑은 두레박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제 그 시간과 공간은

영원에 이어졌다.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4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