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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덕수 시인 / 조금씩 줄이면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8.

문덕수 시인 / 조금씩 줄이면서

 

 

잔고(殘高)를 조금씩 줄이면서

석류알처럼 눈뜨고 싶구나.

 

그동안 흐드러지게 꽃피우거나

나비 벌들 떼지어 윙윙 몰려와

제풀에 뚝뚝 떨어져 묻히는

꿀단지 하나 그득히 빚은 일도 없으나,

 

잎사귀를 한두 잎씩 떨어뜨리고

곁가지 곁넝쿨도 조금씩 쳐내고

몰아치는 성난 돌개바람이나

괴어서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도 돌려서,

겨우내 개울둑에 알몸으로 홀로 서서

이브처럼 눈뜨고 싶구나.

 

조금씩 줄이면서, 시문학사, 1985

 

 


 

 

문덕수 시인 / 종이 한 장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무슨 예감처럼

부들부들 떠는 성난 종이의

언저리에 불이 붙고,

말씀이 삭아서 떨어지는

십육(十六)절지 반(半)의 백지.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선공간, 성문각, 1966

 

 


 

 

문덕수 시인 / 침묵 1

 

 

저 소리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江)물!

 

천년 녹슬은

종(鍾)소리의 그 간곡한 응답을 지니고

황홀(恍惚)한 계시(啓示)를 안은 채

일체를 이미 비밀로 해버렸다

 

황홀, 세계문화사, 1956

 

 


 

문덕수(文德守) 시인

1928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호는 심산(心山), 청태(靑笞)이다. 홍익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64 현대문학상•1978 현대시인상•1981년 아카데미 학술상•1985 펜문학상 수상. 시집: {황홀}(1956), {선(線)·공간(空間)}(1966), {새벽바다}(1975), {영원한 꽃밭}(1976),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1980), {다리놓기}(1982), {문덕수시선}(1983), {조금씩 줄이면서}(1985), {그대, 말씀의 안개}(1986) 등. 현재 홍익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