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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 / 조금씩 줄이면서
잔고(殘高)를 조금씩 줄이면서 석류알처럼 눈뜨고 싶구나.
그동안 흐드러지게 꽃피우거나 나비 벌들 떼지어 윙윙 몰려와 제풀에 뚝뚝 떨어져 묻히는 꿀단지 하나 그득히 빚은 일도 없으나,
잎사귀를 한두 잎씩 떨어뜨리고 곁가지 곁넝쿨도 조금씩 쳐내고 몰아치는 성난 돌개바람이나 괴어서 소용돌이치는 물줄기도 돌려서, 겨우내 개울둑에 알몸으로 홀로 서서 이브처럼 눈뜨고 싶구나.
조금씩 줄이면서, 시문학사, 1985
문덕수 시인 / 종이 한 장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무슨 예감처럼 부들부들 떠는 성난 종이의 언저리에 불이 붙고, 말씀이 삭아서 떨어지는 십육(十六)절지 반(半)의 백지. 죽음과 삶의 사이에 잎사귀처럼 돋아난 흰 종이 한 장.
선공간, 성문각, 1966
문덕수 시인 / 침묵 1
저 소리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江)물!
천년 녹슬은 종(鍾)소리의 그 간곡한 응답을 지니고 황홀(恍惚)한 계시(啓示)를 안은 채 일체를 이미 비밀로 해버렸다
황홀, 세계문화사,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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