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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수옥 시인 / 구독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1.

채수옥 시인 / 구독

 

 

  오늘의 구름은 빨갛게 구워진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 접어놓은 페이지에서 빗방울들이 머뭇머뭇, 억측과 가짜가 난무하는 구름 속에서 부리 없는 새들이 빠져나온다.

 

  종교학 대신 포도밭을 구독하기로 한다. 매년 아슬아슬한 허공이다. 벌레와 우박과 햇빛 위에 별표를 그리고 봄부터 가을까지 천천히 마음을 졸이며 읽어가는 페이지.

 

  구름은 때때로 다른 몸을 입고

  섹션마다 다른 맛들이 열린다.

 

  고양이 카페에서 눈이 마주친 너는, 심장 아래쪽을 흘러 천천히 내 삶의 목록 속으로 들어 왔다. 최근 들어 가장 흥미로운 잡지.

 

  새로운 꼬리

  새로운 모자

  새로운 연애

 

  너를 정기구독해도 될까?

 

  흐르는 구름만큼 너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필자, 창을 수평선 쪽으로 기울이며 나는 긴 혀를 꺼내 위독한 서쪽 노을을 읽는다.

 

  까무러치는 파도가 특집처럼 밀려온다.

  난해한 사례들이 펼쳐진다.

 

 월간 『시인동네』 2019년 8월호 발표

 

 


 

 

채수옥 시인 / 창문들

 

 

오랫동안 손을 넣어 죽은 비둘기를 꺼냈다. 창은 깊고 길었다 우리의 평화는 뭉쳐 놓은 걸레 같았다

 

기차를 타고 창문들이 도착했다. 오래된 풍경들에서 애인 냄새가 난다 목줄을 끌며 산책하는 사람들, 사나워진 길 밖으로 개를 버리고 돌아간다

 

이파리들로 눈앞이 흐려지고 불투명해질 때 창은 구부러지거나 말랑거리기보다 죽기를 결심한다 자신을 산산조각 흩어 놓으며 적의를 드러낸다

 

날카롭게 긁고 가는 번개의 변절 때문에 두통에 시달리는 날이 많았으므로 구름을 불렀다 빗방울 속에,

 

목을 빼고 올려다보는 애인을 집어넣었다 커튼 뒤에서 질투 많은 사과를 낳고 그림자를 낳고 창문을 낳고, 낳아 너무 많은 창을 갖고도 우리는 투명해지지 않는다

 

 시집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파란. 2019) 중에서

 


 

채수옥 시인

1965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200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대칭의 오후』,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