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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시인 / 풀
벌거벗은 칼날처럼 나 그렇게 꽂혀서 살으리, 어디쯤인가 발짝 소리 울리며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대 봄이여, 한아름 껴안고 싶은 이 목메인 그리움 너무나 커다란 맨가슴이기에 이 언 살결로는 기댈 수 없구나 이 메마른 눈물 바칠 수 없구나 다가올수록 더욱 눈 멀게 하는 그대 힘을 내라, 빨리 힘을 내라고 내 엎드린 등 두드리지만 이 찢긴 입술로는 입 맞출 수가 없구나 얼어붙은 땅의 어둠을 밀어헤치고 한줌 푸르름이 있는 곳으로 더 높이, 더 높이 솟아오르고만 싶은 이 피묻은 몸부림 벌거벗은 칼날처럼 나 그렇게 꽂혀서 살으리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73
이가림 시인 / 프루스트의 편지
누님, 기억하시겠지요. 우리의 귀여웠던 과거를 기억하시겠지요. 자살연습으로 그친 내 피스톨의 상처가 회복 될 수 있다면, 우리 고향의 성 미카엘 여자고등학교 근처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요.
요새는 그르넬르 4가, 가장 윤택한 거리에 새로 편물상점을 하나 차리셨다지요. 얼마나 섬세한 마음의 실을 엮어보겠다고 기나 긴 한을 풀으시나요. 하루에도 몇 번씩 옛 사진첩을 넘기며 젖어 있나요.
그때 흰 가방을 팔뚝에 걸고 샌달을 신기 좋아했던 누님은 성 미카엘 여자고등학교 삼학년이었읍니다. 내가 중학교 축구선수의 유니폼을 빛내며 벽돌담 모퉁이를 돌아오는 저녁이면, 크림빛 옥상에서 노오란 애프론을 흔들거나, 종이 비행기를 날리기도 하였읍니다. 때때로 골목의 코나에 숨어 있다 나비처럼 몰래몰래 따라와서는 내 눈을 가리었고, 콤파스와 삼각자의 필통소리를 갑자기 내기도 하였지요.
그즈음 우리는 베드로 성당의 일곱번째 고목나무에 집게벌레의 집을 파놓았고, 키보다 더 자란 호밀들이 소금을 뿌린듯 반짝이는 그 비행장 공터에 오색 유리구슬을 묻었읍니다. 정말 완전히 증명된 피타고라스의 왕국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즐거웠고 평안할 수가 있었읍니다.
색종이만큼이나 이쁜 지혜를 분도기로 재어가며 나는 정직하게 작문을 짓기도 하였지요. 그때의 제목에 `바다와 잠자리'라는 것이 있었던가요. 누님은 순결한 스카트 깊숙히 아네모네같은 비밀을 키워가며, 설겆이도 도와주던 고운 손으로 음악교실에서 피아노를 치기도 하였읍니다. 가끔씩 그 소강당 옆 담쟁이 돌담에 기대어 돌아보곤 했는데, 건반의 아주 환상적인 음계만을 건드리는 손이 어떻게 떨리는가 하고 안쓰러울 때가 많았읍니다.
누님, 기억하시겠지요. 우리의 귀여웠던 과거를 기억하시겠지요. 자살연습으로 그친 내 피스톨의 상처가 회복 될 수 있다면, 우리 고향의 성 미카엘 여자고등학교 근처에 꼭 한 번 가보고 싶어요.
빙하기, 민음사, 1973
이가림 시인 / 피리타령
가시내야, 가시내야 우리도 예전엔 한개 고운 피리였단다 가느랗게 심금(心琴) 울리는 피리였단다 그것은 어느 날인가 피 토하며 지지지 검은 불발탄(不發彈)이 관통해간 피리의 시커먼 구멍. 가시내야 그때부터 찢겨진 사랑의 텅빈 헛소리가 새었단다. 속아서 속아서 병든 게[蟹]같이 어기적거리며 지금은 더 슬프고 팍팍한 땅을 찾아 가고 있다, 가고 있다. 가시내야 비명 하나 내지르지 못하는 이 변두리의 삶을 불지를 수 있다면 뙤약볕 부서져 삐비꽃 피는 고향 바람부는 언덕에서 울고 싶어라. 영영 깨어져버린 피리의 얼빠진 헛소리는 얼마나 서러운 것인가 무심히도 가슴에 그리움 돋아 허연 못물같은 설움이 흐르누나. 가시내야, 가시내야 우리도 예전엔 한개 고운 피리였단다 가느랗게 심금(心琴) 울리는 피리였단다.
빙하기, 민음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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