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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도덕의 원천이신 달이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2.

정현종 시인 / 도덕의 원천이신 달이어

 

 

바람 소리 한 가닥

모래 위에 떨어져 있다

그걸 주어서 만져 보고

귀에도 대 본다

달 뜨는 소리 들린다

 

도덕의 원천이신 달이어 파도여

달 뜨는 눈알에서 내 웃음은

파도 소리를 낸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독무(獨舞)

 

 

  1

 

  사막에서도 불 곁에서도

  늘 가장 건장한 바람을, 한끝은

  쓸쓸해 하는 내 귀는 생각하겠지.

  생각하겠지 하늘은

  곧고 강인한 꿈의 안팎에서

  약점으로 내리는 비와 안개,

  거듭 동냥 떠나는 새벽 거지를.

  심술궂기도 익살도 여간 무서운

  망자(亡者)들의 눈초리를 가리기 위해

  밤 영창(映窓)의 해진 구멍으로 가져가는

  확신과 열애(熱愛)의 손의 운행을.

 

  알겠지 그대

  꿈속의 아씨를 좇는 제 바람에 걸려 넘어져

  종골(腫骨)뼈가 부은 발뿐인 사람아, 왜

  내가 바오로서원의 문유리 속을 휘청대며 걸어가는지를

  한동안 일어서면서 기리 눕는

  그대들의 화환과 장식의 계획에도

  틈틈이 마주잡는 내

  항상 별미(別味)인 대접(待接)을.

 

  하여, 나는

  세월을 패물처럼 옷깃에 달기 위해

  떠나려는 정령(精靈)을 마중 가리.

  부족으로 끼룩대는 속을 공복을

  대해어류(大海魚類) 등의 접시로도 메꾸고

  관(冠)을 쓴 꿈으로도 출렁거리며

  가리 체중 있는 그림자는 무등 태우고.

 

   2

 

  지금은 율동의 방법만을 생각하는 때,

  생각은 없고 움직임이 온통

  춤의 풍미(風味)에 몰입하는

  영혼은 밝은 색채이며 대공(大空)일 때!

  넘쳐오는 웃음은

  ……나그네인가

 

  웃음은 나그네인가, 왜냐하면

  고도(孤島) 세인트 헬레나 등지로 흘러가는 영웅의

  영광을 나는 허리에 띠고

  왕국도 정열도 빌고 있으니. 아니 왜냐하면

  비틀거림도 나그네도 향그러이 드는

  고향하늘 큰 입성(入城)의 때인

  저 낱낱 찰나 딴딴한 발정(發情)!

  영혼의 집일 뿐만 아니라 향유(香油)에

  젖는 살은 반신(半身)임을 벗으며 원앙금을 덮느니.

 

  낳아, 그래, 낳아라 거듭

  자유를 지키는 천사들의 오직 생동(生動)인 불칼을 쥐고

  바람의 핵심에서 놀고 있거라

  별 하나 나 하나의 점술(占術)을 따라

  먼지도 칠보(七寶)도 손 사이에 끼이고.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들판이 적막하다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는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그래 살아봐야지

너도 나도 공이 되어

떨어져도 튀는 공이 되어

 

살아봐야지

쓰러지는 법이 없는 둥근

공처럼, 탄력의 나라의

왕자처럼

 

가볍게 떠올라야지

곧 움직일 준비 되어 있는 꼴

둥근 공이 되어

 

옳지 최선의 꼴

지금의 네 모습처럼

떨어져도 튀어오르는 공

쓰러지는 법이 없는 공이 되어.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주고 받음이 한 줄기

바람 같아라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차지 않는 이 마음.

 

내 마음의 공터에 오셔서

경주를 하시든지

잘 노시든지

잠을 자시든지……

 

굿나잇.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말의 형량(刑量)

 

 

한 알의 밀이 썩는 아픔, 한 덩어리의 말의 불이 타는 아픔, 말씀이 살이 된 살이 타는 무두질의 아픔, 제가 하는 바를 모르고 하는 저 죽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말의 이별의 슬픔, 이별 슬픈 말, 완강한 어둠의 폭력에 상처 입은 한 줄기 빛의 예리한 아픔의 아름다움, 어둠 긁는 말의 마디마디에 흐르는 피의 아픔의 아름다움, 어둠 슬픈 말, 꽃도 피면 시드나니가 아니라 시들음의 향기화(香氣化), 죽음에 향기를 충전하는 삶의 필요성, 큰 죽음은 크게 반짝이고 작은 죽음은 작게 반짝임, 별 하나 나 하나, 두려움, 말의 두려움, 말 하나 나 하나의 두려움, 말을 사랑하는 두려움, 말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말의 사랑을 모르는 자의 무신(無神)적 폭력, 가엾음, 분노, 가엾음의 분노, 분노의 가엾음…… 말이 머리 둘 곳 없으매 시대가 머리 둘 곳이 없다.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