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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인 / 매미 울음에
우리 마음을 비추는 한낮은 뒤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 울음. 머언 어린날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기삐 그려낼 수 있는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 매미가 우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모란 송가(頌歌)
얼마 전까지 봄뜰을 수놓았던 꽃들은 겨울을 넘긴 어려움을 따라서 가늘고 여릿하게만 그 아름다움을 겨우 나타내더니
지금 천지가 화창한 녹음으로만 덮인 철에는 마치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든든하고 실한 모란이 온 세상의 기운을 한군데로 한군데로만 집중시켜 그 모습 환하게 피어오르나니
꽃을 처음으로 꽃같이 보는 이 눈부신 한나절 일력(日歷)은 어쩌면 이 때부터 시작되느니라.
해와 달의 궤적, 신원문화사, 1990
박재삼 시인 / 모월모일(某月某日)
종일을 뙤약볕에 살 깎이는 황토(黃土)재의 아픔을 곰곰 생각하며 가다란 폴폴폴 날리는 흙바람도 헤아려 보는가 아내여 그대 또한 언덕처럼 젖가슴 풀어 헤쳐 누워 있고 구름의 나들이가 보기 좋은 시방 마당 구석에는 약탕(藥湯)이 끓고 있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목섬 이야기
우리의 바닷마을에 옛날엔 바람난 가시내가 있었다 한다. 바닷바람이 무서웠더란다. 치마 끝에도 이는 바람은 꼭 귀신(鬼神) 소리더란다. 사람들의 눈 흘기는 눈짓보다도 더욱 몸을 휘감고 보채는 바닷바람이었더란다. 무서워 방에 앉아 있을라치면 또한 아쉽기도 한 바람소리였더란다. 그 바람의 한 자락을 잡을락했던지는 모르지만 하루에도 몇 차례를 방문을 차고 머리 헝클어진 채 바다 쪽으로 내닫더란다. 그러나 바람에 얹힌 집채만한 물고래에 무서움 질려 집으로 돌아오곤 하더란다.
바람에 못견디는 그짓 밖에는 아궁이에 한 고래 불 때는 일이 그 전부(全部)였더란다. 부지깽이로 거둔, 불에도 홀리어 눈이 쓰린 욕보던 가시내였더란다.
그런 세월과, 그런 갈증과, 그런 마을에, 바람 기운이 없는 어느날 앞바다를 섬 하나이 흘러오고 있었더란다.
마침, 불 때나 볼 붉은 그 가시내가 부지깽이를 든 채 나와선, 가슴 차도록 섬이라도 안으면 살 길이나 열리리라 믿었던가 한바다에 뛰어들어 죽었더란다.
그때부터란다. 우리의 바닷마을의 바람막이 목섬이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 태(態)의 숲으로 시집살이 오래오래 살아온단다.
* 목섬: 목섬(首島)은 내 고향 경남 삼천포(慶南三千浦)의 앞바다에 있는 섬
비듣는 가을나무, 동화출판공사, 1981
박재삼 시인 / 무봉천지(無縫天地)
저저(底底)히 할말을 뇌일락하면 오히려 사무침이 무너져 한정없이 멍멍한 거라요. 문득 때까치가 울어오거나 눈은 이미 장다리꽃밭에 흘려있거나 한 거라요. 비오는 날도, 구성진 생각을 앞질러 구성지게 울고 있는 빗소리라요. 어쩔 수 어쩔 수 없는 거라요. 우리의 할 말은 우리의 살과 마음 밖에서, 기쁘다면 우리보다도 기쁘게, 슬프다면 우리보다도 슬프게, 확실히 쟁쟁쟁 아지랑이되어 있는 거라요. 참, 그때, 아무도 없는 단오(端午)의 그네 위에서 아찔하였더니, 절로는 옷고름이 풀리어, 사람에게 아니라도 부끄럽던 거라요. 또는 변학도(卞學道)에게 퍼부을 말도 그때의 장독(杖毒)진 아픔의 살이, 쓰린 소리를 빼랑빼랑 내고 있던 거라요. 허구헌 날 서방님 뜻높을진저 바라면, 맑은 정신 속을 구름이 흐르고 있었고, 웃녘에 돌림병(病)이 퍼져 서방님 살아 계시기를 빌었을 때에도 웃마을의 복사꽃이 웃으면서 뜻을 받아 말하고 있던 거라요. 그러니 우리가 만나 옛말 하고 오손도손 살 일이란 것도, 조촐한 비 개인 하늘 밑에서 서로의 눈이 무지개 선 서러운 산등성 같은 우리의 마음일 따름이라요.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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