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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태일 시인 / 가거도(可居島)*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2.

조태일 시인 / 가거도(可居島)*

 

 

너무 멀고 험해서

오히려 바다같지 않는

거기

있는지조차

없는지조차 모르던 섬.

 

쓸 만한 인물들을 역정내며

유배 보내기 즐겼던 그때 높으신 분들도

이곳까지는

차마 생각 못 했던,

 

그러나 우리 한민족 무지렁이들은

가고, 보이니까 가고, 보이니까 또 가서

마침내 살 만한 곳이라고

파도로 성 쌓아

대대로 지켜오며

후박나무 그늘 아래서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당할아버지까지 한식구로 한데 어우러져

보라는 듯이 살아오는 땅.

 

비바람 불면 자고

비바람 자면 일어나

파도 밀치며

바다 밀치며

한스런 노랫가락 부른다.

 

산아 산아 회룡산아

눈이 오면 백두산아

비가 오면 장내산아

 

바람불면 회룡산아

천산 하산 넘어가면

부모형제 보련마는

원수로다 원수로다

산과 날과 원수로다*

 

낯선 사람 찾아오면 죄 많은 사람 찾아오면

태풍 세실을 불러다가

겁도 주고 달래 보고 묶어 보고 풀어 주는

바람 바람 바람섬,

파도 파도 파도섬.

 

길가는 나그네여!

사월혁명의 선봉이 되어

반민주 반독재와 불의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십구일 밤 무참히 떨어진

십구세의 대한의 꽃봉오리가 여기

누워 있다고 전해다오*

 

자식 길러 가르치고

배운 자식 뭍으로 보내

나라 걱정, 나라 위해

목숨도 걸 줄 아는

멋있는 사람들이 사는

살 만한 땅.

 

* 전남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서남단의 섬. 흔히 소흑산도라 하지만 이는 일제시에 일본인이 붙인 이름으로 행정상의 지명도 가거도임. 현지 주민들도 꼭 가거도라고 부르며 소흑산도란 말을 쓰면 싫어함.

 

** 가거도 주민들이 그곳 전설을 민요화해서 부르는 노래.

 

** 이곳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김부연(金富連)군이 4․19혁명에 가담하여 산화했는데, 그 기념비가 이 가거도에 세워져 있음.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조태일 시인 / 가시내 환영(幻影)

 

 

그날 나는

욕망이 떠나가 버려서

책갈피에서 느닷없이 튀쳐 나오는

허약한 내 방의, 기별 없이 모이는

그 연애(戀愛)가 별나고 하도 하도 신기해서

 

나의 마지막 남은 사랑은

여인을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성실한 화가가 차려 놓은 세계의,

가난한 `가시내' 앞에

인사도 없이 앉았었지.

 

머리는 치렁치렁 나의 시간들을 얽혀 이고

두 눈엔 태양이 젖어 있을 때

울부짖는 야수를 위하여

한번 패배를 위하여

헤엄치는 섹스 가까이서 나는 잠을 잡았었지.

 

짐승들의 날쌔인 행동이 익고

쓰러진 시신(屍身)들 사이

그 어둑한 곳에 나를 눕히고!

내 사랑을 눕히고.

 

너는 상냥한 이브.

불붙는 `가시내'여, 불붙는 `가시내'여!

나는 옆에서 가장이 되어 가고 있을 때

너의 두 눈에선 태양이 서서히 기어 나오고

시간은 폐병(廢兵)처럼 머리에서 기어 내리고

밑모를 깊이에서

나는 둥둥 떠 있었지.

 

아침 선박, 선명문화사, 1965

 

 


 

 

조태일 시인 / 가을엔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돌아가게 하라.

곱게 물든 단풍잎 사이로

가을 바람 물들며 지나가듯

지상의 모든 것들 돌아가게 하라.

 

지난 여름엔 유난히도 슬펐어라

폭우와 태풍이 우리들에게 시련을 안겼어도

저 높푸른 하늘을 우러러보라.

누가 저처럼 영롱한 구슬을 뿌렸는가.

누가 마음들을 모조리 쏟아 펼쳤는가.

 

가을엔 헤어지지 말고 포옹하라.

열매들이 낙엽들이 나뭇가지를 떠남은

이별이 아니라 대지와의 만남이어라.

겨울과의 만남이어라

봄을 잉태하기 위한 만남이어라.

 

나름대로의 길

가을엔 나름대로 떠나게 하라.

단풍물 온몸에 들이며

목소리까지도 마음까지도 물들이며

떠나게 하라.

다시 돌아오게, 돌아와 만나는 기쁨을 위해

우리 모두 돌아가고 떠나가고

다시 돌아오고 만나는 날까지

책장을 넘기거나,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를 띄우거나

아예 눈을 감고 침묵을 하라.

자연이여, 인간이여, 우리 모두여.

 

산속에서 꽃속에서, 창작과비평사, 1991

 

 


 

 

조태일 시인 / 간추린 풍경(風景)

 

 

꽃이 핀 안 핀 천년 묵은 꽃나무 위

꿀벌레 나비떼들 시간의 등을 타고 올라

햇빛에 꽂혀 파닥거리고 숨가빠 하고.

 

일터가 있는 없는 노동자의 머리 위

눈 곯았냐, 가벼운 바람 따라

폭력의 구름떼 자유로이 지나가고 쏘내기 뿌리고.

 

부부 싸움을 끝낸 안 끝낸 남녀노소의

가슴속 깊이 빨간 열매 그립냐,

사랑의 파도 소리 이리저리 밀리고 고함치고.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내 몸은 앉으면서 일어나면서 꺼이꺼이 울고 깃발이 되고.

 

식칼론, 시인사, 1970

 

 


 

조태일(趙泰一. 1941년-1999년) 시인

전남 곡성 출생. 1970년대 유신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시를 발표하고 여러 차례 옥고를 치러 '저항시인'으로 불렸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문학 석사학위(1985), 박사학위(1991)를 받음.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1964년, 시 〈아침선박〉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69년 월간 시 전문지 〈시인〉을 창간해 김지하·양성우·김준태 등을 등단시킴. 1974년에는 고은·백낙청 및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과 함께 민족문학운동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1987년 9월 17일 창립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모체가 됨. 1989년 이후 광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1994~1999 예술대학장을 역임.

시집 〈식칼론〉(1970), 〈국토〉(1975), 〈가거도〉(1983), 〈연가〉(1985), 〈자유가 시인더러〉(1987),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 등을 펴냄.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1995)로 제10회 만해문학상을 수상. 1991년 전라남도 문화상, 1992년 편운문학상, 1993년 성옥문화상, 1995년 만해문학상을 받음.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