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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수옥 시인 / 앵무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2.

채수옥 시인 / 앵무새

 

 

지난여름을 베끼며 매미가 운다

다르게 우는 법을 알지 못한 자책으로

올해도 통곡 한다

 

속옷까지 벗어야 너를 뒤 집어 쓸 수 있지

냉소적으로 웃는 침대는

뾰족한 부리를 닮은 침대를 낳고, 낳는데

 

저녁은

간혹

버려진 유령의

흉내를 낸다

 

이 축축한 혓바닥이 닳아 없어져야 똑같은 문장이 사라지겠지

 

수십 년 전에 죽은 할머니와 엄마들을 갈아입고

언니들이 태어난다

 

시집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파란. 2019) 중에서

 

 


 

 

채수옥 시인 / 닥터, 일병

 

 

오른쪽은 변명으로 기우는 거울. 왼쪽은 하소연으로 흩어지는 안개. 흘러내리는 얼굴을 움켜쥐고 라이언 일병들은 건너편 초록 병사들과 연합전선을 이룬다

 

반복과 어긋남

비틀거리는 대화 속에서 나를 꺼내 줘

 

바닥이 일어서서 벽이 되고 다시 바닥으로 돌아갈 때까지, 먼 곳의 애인들이 떠나고 돌아올 때까지, 현기증이 되고 소설이 되고 전쟁의 역사가 되어,

 

퇴로가 막힐 때쯤

 

-이모 여기 소주 일병 추가요-

 

군기 바짝 든 일병은 혈관 깊숙이 파도를 접어 넣는다. 포탄이 쏟아지는 모래 언덕을 주사 하고, 잇몸 사이에서 곪아가는 엄마를 뽑아낸다. 엄마가 썩고 있던 자리에 피가 고인다.

 

입 속에서 울렁거리는 파도와 허물어지는 모래언덕을 물고 라이언 일병들이

구토를 건너가는 동안

 

허공이 깨지는 소리가 난다

 

소주 일병이 날고 있다

어둠을 돌파하고 있다

 

 시집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파란. 2019) 중에서

 


 

채수옥 시인

1965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2002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대칭의 오후』,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