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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영 시인 / 수월관음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1.

김혜영 시인 / 수월관음도

 

 

연꽃 위에 앉은 사람은

여자인가 동물인가 제 3의 성인가

귀를 닫아야 눈이 열린다는데

 

달빛 아래 앉은 남자인지

영원히 사는 귀신인지

 

물빛의 노래를 듣는다

피아노 건반을 지나가는 손가락이

달을 가리킨다 손목이 꺾인 사내는

목발을 짚고서야 집을 나간

여자의 슬픈 어깨를 본다

 

연꽃이 더러워 숲으로 떠난다는

철새의 귀는 언제 열리는가

 

여관방에서 한 이불 아래 입술을 빨던

사내는 아내를 때린다

여자는 달빛을 타고 휘파람을 분다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아 블록을 쌓듯

강박증자는 불결한 손을 씻고

의심하는 사내는 불안한 꿈을 꾸고

 

귀신인지 부처인지 사내인지

수월관음도를 듣는다

 

음악을 들어도

음표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여자의 위치는 오선지 안에도 바깥에도 없다

 

몸 안에 갇힌 눈동자가

수월관음도의 음성을 듣는다

 

양 갈래 머리를 땋은 동자가 말한다

난 몰라요 의미를 몰라요

무의미한 게 삶이라는데

 

어쩌겠어요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당신이 눈앞에 있어

소중해요 그것뿐이에요

 

계간『사이펀』 2019년 가을호 발표

 

 


 

 

김혜영 시인 / 냄비와 구두

 

 

  쇠를 두드리면, 남아메리카로 날아간 나비가 돌아올까. 멕시코 국경을 넘은 애인을 따라간 딸이 돌아올까. 눈 먼 소처럼 울먹이는 엄마는 화분에 물은 준다. 베란다 화분에는 가시 없는 선인장이 자란다. 빌어먹을 계집애, 사내가 그렇게 좋은가. 엄마는 남자가 징글징글하던데, 그렇게 사내가 좋은가. 화분에는 식물이 자라고, 병든 장미가 피고, 하늘빛 수국도 핀다. 페루에서 와인을 마시는 딸은 집시처럼 웃는다. 쇠를 두드리면, 대장장이처럼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까. 지난 밤 꿈속에 엄마는 인디언 전쟁터를 누볐지. 사백년 전이었을까. 긴 칼을 휘둘러 적의 심장을 찔렀지.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빼고 겨우 도망쳤지. 머리가 잘린 귀신이 이마를 쓰윽 만졌지, 벌떡 깨어나 쇠를 두드린다. 냄비를 두드려 차곡차곡 쌓는다. 엄마는 냉동된 소의 꼬리뼈에서 핏물을 뺀다. 미지근한 물에 풀리는 핏빛 슬픔, 딸은 해가 져도 계절이 다 지나가도 소식이 없다. 쇠를 두드리면, 페루의 끝까지 날아간 딸이 돌아올까. 칼은 소의 등뼈를 가르고, 뼈가 부서지는 통증처럼 딸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엄마, 저예요. 사랑한 게 죄는 아니잖아요. 냄비를 차곡차곡 쌓는다. 쇠를 두드리면, 이승의 인연 너머에 있는 거미줄을 볼 수 있을까. 냄비를 두드려 차곡차곡 쌓는다. 굽 높은 구두의 모습으로 냄비를 쌓는다. 딸아, 넌 엄마처럼 살지 말고 날아가렴, 굽 놓은 구두를 신고 국경을 넘어 날아올라라, 너무 멀리 날아간 딸은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쇠를 두드리면, 페루의 마추픽추까지 날아간 나비가 돌아올까.

 

계간『시와 사상』 2019년 가을호 발표

 

 


 

 

김혜영 시인 / 시계는 사과나무의 사랑을 모르고

 

 

사랑이 식어갈 때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식은 밥은 향기가 사라진다. 먹다 남은 밥그릇에 덕지덕지 붙은 밥알의 감정이 딱딱하게 말라간다.

 

생일날 아침, 분홍 수국이 식탁으로 왔다. 케이크는 부풀어 오른다. 고집을 부리다 혼난 아이는 울먹이고

 

사랑이 타오를 때 노을은 붉은 심장을 감추느라 어쩔 줄 몰랐지. 영글어가는 사과는 미래의 계절로 떠난다. 내일로 걸어가는 시계를 모르는 아이는 사과나무에 올라 사과를 딴다.

 

수녀원은 고요했지.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에 난 가만히 누워 있었어. 책상 위의 조그만 램프에 불이 켜졌지. 무한한 사랑이 심장을 관통하듯 언어 너머의 세계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어.

 

내 마음 속 블랙홀이었을까

나의 실재였을까

우주였을까

 

생일날 저녁, 잠시 우울한 러시아 민요가 들린다. 어쩌면 이 곳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선택한 삶인지도 몰라요. 서로 어긋나는 말, 비켜나는 시선, 날카로운 비명을 감싸는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사랑이 익어가는 냄새를 풍기면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물들. 수국 화병에 물을 준다. 꽃에게 인사를 하고 식탁 의자에게 문득 말을 건넨다. “고마워요.”

 

계간『신생』 2019년 겨울호 발표

 

 


 

김혜영 시인

경남 고성에서 출생. 부산대 영어영문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97년 《현대시》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천년의시작, 2004), 『프로이트를 읽는 오전』(지혜, 2011)과 평론집 『메두사와 거울』,『분열된 주체와 무의식』 산문집 『아나키스트의 애인』이 있음. 2010년 제8회 애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