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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노래에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1.

정현종 시인 / 노래에게

 

 

노래는

마음을 발가벗는 것

 

노래는

나체의 꽃

나체의 풀잎

나체의 숨결

나체의 공간

의 메아리

 

피, 저 나체

죽음, 저 나체

그 벌거숭이 대답의 갈피를 흐르는

노래, 벌거숭이

무장(武裝)도 화장(化粧)도 없는 숨결

 

돌아가야지 내 몸 속으로

돌아가야지 모든 몸 속으로

불꽃이 공기 속에 있듯

그 속에서 타올라야지

 

마음을 발가벗는

노래여

내 가슴의 새벽이여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노시인(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원제 : 노시인(老詩人)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의 말씀

부제 : 사랑사설(辭說) 둘

 

 

나는 참을 수 없이 그분들이 내 할아버지라는 느낌이다. 그분들의 핏줄과 내 핏줄이 하나여서 어쩔줄을 모르겠다. 일테면 1970년 5월 29일 저녁, 노인들이 환장하게 보고 싶어서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시제(詩祭)에 갔다가 들은 김광섭(金珖燮)선생의 답사 `나는 사람들과 같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해서 시를 씁니다'는 즉시 하늘로 올라가 김광섭의 별이 되어 빛나기 시작했고 내 머리에는 뜨끈한 물이 넘쳤다.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 그분들이, 예술보다 짧은 인생의 오랜 동안을 집을 찾아 헤매이다 돌아온 어린애라는 느낌을 나는 참을 수 없다. 반갑구나 얘야, 내가 망령이 아니다 얘야 소를 잡으마, 때때로 그분들 중의 누가 딱딱한 무명(無明) 때문에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때도 있기는 있지만, 그렇긴 그렇지만, 제 발등에 불부터 끄는게 급함을 알기는 알아야지, `제'란 누구인가? 시인, 시의 발등, 정신의 발등, 일의 순서는 알아야지, 어떤 흉악한 홍수, 폭력(물리(物理)․물질․허위의)등이 휩쓸면 각각 힘을 다해 자기의 칼 아름답게 갈아야지, 젊은 시인들도 자   속에 무명(無明)과 사술(詐術)을 키우지 말아야지, 제가하는 바를 알고 해야지……시 쓰는 자식 열을 거느린 뮤즈 어머니의 말씀이 너희들끼리 싸우는 일이 급한 건 아니다, 발전을 위해 결코 싸울 필요가 있다면 너 자신과 싸우듯이 싸워라―그러나 어머니는 계모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핏줄이 다른 자가 있나이다―오냐 곡식 중에는 쭉정이도 있느니라, 곡식은 거두고 쭉정이는 버리리라, 거듭 부탁하지만 싸우되 방법적 회의와 방법적 미움을 다 안고 있는 방법적 사랑으로 싸워라, 너희에게는 무엇보다도 너희 공동의 적(敵)이 있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기의 가장 큰 적이란다. 상식의 슬픔. 슬픔 다사(多謝).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눈짓 하나가 탄생을 돕는다

 

 

  너는 태어나려고 애쓴다

  네가 태아처럼 꼬부리고 걸어갈 때

   네가 헤엄치듯 잠들 때

  물과 햇빛 속의 태기를 마실 때

 

  너는 태어나려고 애쓴다

  너의 키와 체중 속에서, 옷 속에서, 밥

  과 꿈 속에서, 네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

  속에서

 

  아 태어나려고 애쓴다

  납작한 것들 속에서

  찢어지는 것들 속에서

  길들여진 정신

  무서워하는 기교 속에서

  명랑한 저 달빛 아래 쥐죽은 거리에서

  석탄 백탄 속에서

  아 막무가내의 기쁨 속에서.

 

  눈짓 하나가 탄생을 돕는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자꾸 자꾸 물을 줘야 해요

나무도 사람도 죽지 않게

죽음이 공기처럼 떠도는 시절에

그게 우리가 숨쉬는 이유

그게 우리가 꿈꾸는 이유

 

당신의 마음, 당신의 몸은

얼마나 깊은 샘입니까

사람의 기쁨과 슬픔의 가락으로

그 보석의 가락으로 솟는 샘

 

가슴도 손도 꽃피고

나무와 풀

집과 굴뚝들도 꽃피게

초록초록 자라게

땅의, 보석의,

온몸의 가락을 다해 솟는 샘―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라는 굴뚝의 어린 시절

던지는 돌에 날개 돋는 어린 시절

돛 단 지평선의 어린 시절

오, 경이의 어린 시절,

늙고 병든 이 세상에게

그 시절을 되찾아 주게!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한 처녀가 자기의 눈 속에서

나를 내다본다

 

나는 남자와

풍경 사이에서 깜박거린다

 

남자일 때 나는

말발굽 소리를 내고

 

풍경일 때 나는

다만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달도 돌리고 해도 돌리시는 사랑이

우리 눈동자도 돌리시느니

 

한 남자가 자기의 눈 속에서

처녀를 내다본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 시인 / 대취(大醉)

 

 

걸리는 데마다 소리내는 강풍

그 센 바람 소리는

내 속의 대취(大醉)한 까닭없는 밑빠진

불길에 자꾸 기름을 부어

두루 태우고 뒤집고 열고 켜고

뿔뿔이 놓아주고 한군데 모으고

요컨대 세상을 깨끗이 재편하고

광물들 금속성 번쩍이게 하고

천지 귀신 휘몰아 잔치하고

눈들 말똥거리게 하고

마음 한가운데서 강풍의 제일

고요한 부분 회치고

나는 또 그러한 지병(持病)에 취해

오호라 대취(大醉)의 불타는 꽃 속에

걸리는 데 없이 흥청거리느니

날개보다 더 이르는

밑빠지게 서늘한 공기로 흐르느니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문학과지성사, 1984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