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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시인 /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맨드라미 몇 송이 머리 잘려 서 있는 길
그날의 불 뿜는 기총소사 곰보가 된 흙벽돌 담장 너머 내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 바라보면 까마중 따먹던 시절이 흰 자막(字幕)처럼 지나가고
시외버스 정류장 옆 빈터에 산나물 팔러 오는 먼 친척인 것만 같은 아낙네들의 새까만 얼굴들,
소주 마신 듯 붉은 달이 비틀거리는 개울물에 바퀴를 씻고 무거운 그림자 끌며 돌아가는 달구지들의 하루
짠 고들빼기 김치맛 나던 곳 고왔던 양가집 사랑 모두 시들어져 낯선 골목마다 다 닳아진 창(唱) 몇 가닥 빨래처럼 펄럭이누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 이슬의 꿈
내가 이슬이 되어 칼날 선 풀잎을 타고 차디 찬 어둠을 넘어서 가는 새벽 그 실날 같은 외길 끝에 언제나 나를 부르는 별 하나 떨고 있었네
천길 벼랑 위에 환한 금강초롱의 등불로 매달려 날 기다리는 얼굴 하나 있어 입술 터지고 무릎 피멍들어 문드러져도 캄캄한 안개 속 홀로 갈 수 있었네
삶은 온몸을 찰나에 내던지는 눈부신 죽음
그대와 나 조그만 빛의 이슬이 되어 생의 사닥다리 그 아득한 꼭대기에서 떨어지고파 부서지고파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 정읍기행(井邑紀行)
개구리들이 육자배기로 울어제키는 논길을 가면 떠올라라 대창에 찔려 곤두박힌 어떤 장정의 피묻은 잠
약삭빠른 비료가 무더기로 밀어닥쳐 그 꿀벌떼 잉잉대던 자운영 논을 뒤엎고 남은 건 한 가마니의 빈 겨 한 가마니의 설움 뿐 두엄자리 오줌에 재려 태어난 일찌기 뒈져야 마땅한 낱알로서 버려진 머슴으로서 들말같이 살아온 흉터의 사내가 낫을 들어 내리찍은 그림자 제길할, 제길할, 제길할 푸짐한 달덩이도 뜨면 무엇하나 홀로 골방에 가서 죽을거나
옛 방앗간의 전깃불 아래 한 사발 막걸리를 얻어마시고 논길을 가면 부끄러워라 서울에서 팔린 젊은 늑대의 발톱, 빛나는 이빨
빙하기, 민음사, 1973
이가림 시인 / 찌르레기의 노래 3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그대 따스한 슬픔에 내 언 슬픔을 묻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밤길 뿐이었던 나날들 언제나 캄캄했다고 말하지 않으리
우리가 정녕 생의 거미줄에 매달린 하나가 되기 위한 두 개의 물방울 같이 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로 다가간다면 번개불 번쩍 내리쳤다 스러지는 그 찰나 그 영원 속에 별 머금은 듯 영롱한 눈물의 보석 하나 아픈 땅에 떨굴 수 있으리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오늘밤 화알활 피어나는 그대 모닥불 품에 내 사그러져가는 영혼의 숯을 태우고 말리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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