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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림 시인 /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1.

이가림 시인 / 이끼 낀 고향에 돌아오다

 

 

맨드라미 몇 송이

머리 잘려 서 있는 길

 

그날의 불 뿜는 기총소사

곰보가 된 흙벽돌 담장 너머

내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 바라보면

까마중 따먹던 시절이

흰 자막(字幕)처럼 지나가고

 

시외버스 정류장 옆 빈터에

산나물 팔러 오는

먼 친척인 것만 같은 아낙네들의

새까만 얼굴들,

 

소주 마신 듯

붉은 달이 비틀거리는

개울물에

바퀴를 씻고

무거운 그림자 끌며 돌아가는

달구지들의 하루

 

짠 고들빼기 김치맛 나던 곳

고왔던 양가집 사랑 모두 시들어져

낯선 골목마다

다 닳아진 창(唱) 몇 가닥

빨래처럼 펄럭이누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 이슬의 꿈

 

 

내가 이슬이 되어

칼날 선 풀잎을 타고

차디 찬 어둠을 넘어서 가는 새벽

그 실날 같은 외길 끝에

언제나 나를 부르는 별 하나

떨고 있었네

 

천길 벼랑 위에

환한 금강초롱의 등불로 매달려

날 기다리는 얼굴 하나 있어

입술 터지고

무릎 피멍들어 문드러져도

캄캄한 안개 속

홀로 갈 수 있었네

 

삶은 온몸을 찰나에 내던지는

눈부신 죽음

 

그대와 나

조그만 빛의 이슬이 되어

생의 사닥다리

그 아득한 꼭대기에서 떨어지고파

부서지고파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 정읍기행(井邑紀行)

 

 

개구리들이 육자배기로 울어제키는

논길을 가면 떠올라라 대창에 찔려

곤두박힌 어떤 장정의 피묻은 잠

 

약삭빠른 비료가 무더기로 밀어닥쳐

그 꿀벌떼 잉잉대던 자운영 논을 뒤엎고

남은 건 한 가마니의 빈 겨

한 가마니의 설움 뿐

두엄자리 오줌에 재려 태어난

일찌기 뒈져야 마땅한 낱알로서 버려진 머슴으로서

들말같이 살아온 흉터의

사내가 낫을 들어 내리찍은 그림자

제길할, 제길할, 제길할

푸짐한 달덩이도 뜨면 무엇하나

홀로 골방에 가서 죽을거나

 

옛 방앗간의 전깃불 아래

한 사발 막걸리를 얻어마시고

논길을 가면 부끄러워라 서울에서 팔린

젊은 늑대의 발톱, 빛나는 이빨

 

빙하기, 민음사, 1973

 

 


 

 

이가림 시인 / 찌르레기의 노래 3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그대 따스한 슬픔에

내 언 슬픔을 묻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밤길 뿐이었던 나날들

언제나 캄캄했다고

말하지 않으리

 

우리가 정녕

생의 거미줄에 매달린

하나가 되기 위한 두 개의 물방울 같이

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로 다가간다면

번개불 번쩍 내리쳤다 스러지는

그 찰나 그 영원 속에

별 머금은 듯 영롱한

눈물의 보석 하나

아픈 땅에

떨굴 수 있으리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오늘밤

화알활 피어나는

그대 모닥불 품에

내 사그러져가는 영혼의 숯을

태우고 말리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남. 2살 이후부터 전주에서 살면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루앙대학교대학원 불어불문학과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 당선. 1973년 첫시집 빙하기(민음사). 그 외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작과 비평사). 슬픈 반도(예전사). 순간의 거울(창작과 비평사). 내마음의 협궤열차(시와 시학사). 바람개비별(시학).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시와 시학사). 에세이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월간미술사). 그외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살라방드르가 사는 곳 등. 한국펜클럽번역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인하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