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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규원 시인 / 아침부터 소화가 안 되는... 원제 : 아침부터 소화가 안 되는 얼굴을 한 꽃에게
또 무슨 일인가. 아침부터 소화가 안되는 얼굴을 하고 오른쪽 허리를 약간 꺾은 채 서서, 하늘을 보았다 나를 보았다 하는 꽃이여. 요즘은 늘 소화가 안되는 것을, 어제까지는 소화가 잘된 양 착각하고 있는 불행한 사태는 아닐 터이고, 훼스탈을 먹는 일보다 훼스탈을 우리와 함께 여기 있게 하는 그 일로 우리가 존재함을 혹시 내가 잊을까 그런 얼굴을 다시 해 보이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얼굴이 그대의 웃는 얼굴인 것을 또는 가장 매혹적인 그대의 자태인 것을, 그대를 잘못 보고 있듯 내 눈 깊숙한 어느 부분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병(病)이 있음을, 늦지 않게 더 늦기 전에 알아 두라는 뜻인가. 그 어느 쪽이든, 고맙다 꽃이여.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아카시아
아카시아를 심지 말아라 아카시아는 땅 속의 숨은 뿌리가 더 무섭다 꽃과 잎들은 뿌리의 성(城)이며 해자(垓字)이다 포크레인의 쇠갈고리 같은 뿌리들이 땅 속을 헤집으며 무엇이든 긁어쥐고 와작와작 씹어 삼킨다 아카시아나무 밑 땅 속은 버려진 냄비며 철물이며 외로운 돌무더기 몇몇(흙이 없는 저 땅의 속이며 언어의 속이며……) 뿌리 저희들만 동서로 뻗고 있다 아카시아나무의 그늘 밑에는 모두 파먹어 형체 있는 무덤도 하나 없다 온몸에 일사불란하게 돋아 있는 가시와 잎― 살아 있는 저 맹목 육체의 길을 알면서 햇볕은 여전히 싸안고 얼러대고
사랑의 감옥, 문학과지성사, 1991
오규원 시인 /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1
어둠이 내 코 앞, 내 귀 앞, 내 눈 앞에 있다. 어둠은 역시 자세히 봐도 어둡다 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나를 욕한다. 그러나 어둠은 자세히 봐도 역시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면 어둠의 코도 역시 어둡고 눈도 귀도 어둡다.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스스로 어둠이 되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거리를 두는 길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어둠을 자세히 보는 방법은 뭐니뭐니해도 어둠이 어두운 게 아니라 어두운 게 어둠이라는 사실이다.
2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모든 것은 어둠이다.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꽃도 사랑도 청춘도 어둠이고 어두운 게 어둠이므로 어두운 날 본 태양도 어둠이다. 그러니까 어두운 것으로 뭉친 어둠은 어둡지 않는 날 봐도 역시 어둡다.
3
어둠이 어두운 것이라면, 만약 어둠이 어두운 것이라면, 그러므로 결국 어둠 외에는 어두운 게 아니다 라는 확신을 가져도 좋다고 친절히 내가 말해도 사람들은 나더러 말장난한다고 말한다.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문학과지성사, 1981
오규원 시인 / 용산(龍山)에서
시(詩)에는 무슨 근사한 얘기가 있다고 믿는 낡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 시(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은 우리의 생(生)밖에.
믿고 싶어 못 버리는 사람들의 무슨 근사한 이야기의 환상(幻想)밖에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의지(意志)와 이상(理想) 속에 자라며 흔들리듯 그대의 사랑도 믿음도 나의 사기(詐欺)도 사기(詐欺)의 확실함도 확실한 그만큼 확실하지 않고, 근사한 풀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확실하지 않음이나 사랑하는 게 어떤가. 시(詩)에는 아무것도 없다. 시(詩)에는 남아 있는 우리의 생(生)밖에. 남아 있는 우리의 생(生)은 우리와 늘 만난다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조금도 근사하지 않게.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 시인 / 우리는 어디서나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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