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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눈 속에 맞는 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1.

박재삼 시인 / 눈 속에 맞는 봄

 

 

온 천지

눈이 하얗게 덮고 있으면

봄은 언제 오겠느냐 싶지만

 

그러나 그런 기운 속에

자세히 살피면

시방 부지런을 떨며

파란 싹이 땅에서 솟는 것을

하도 어려 다둑거려 보호하고 있거나

나무에도 움이 트는 것에

더 물끼를 주고 있거나 하고

실은 이 추이(趨移)가 얼마나

눈부신 진행 속에 있는가

 

그리하여

이 소한 대한 지나면

어느새 그 이름부터가

입춘 우수로 탈바꿈하여

그 지독하고 눈물겨운 겨울을

점두(點頭)를 섞어

아득하게 돌아보게 되리라.

 

해와 달의 궤적, 신원문화사, 1990

 

 


 

 

박재삼 시인 / 달밤이 어느새

 

 

사랑하는 사람아

네 눈은 늘 달밤이 되어 있었다.

 

이울 줄 모르는

보름달이 떠

 

간혹은 기쁜 듯이

소슬바람도 어리고

 

나는 잘못도 없으면서

한없이 빌고 싶었다.

 

그런 달밤이 어느새

피와 살에 젖어

 

이제 눈앞에는

안개비 뿌리는 피범벅이여

 

또한 사정없이

진눈깨비 날리는 살범벅이여.

 

천년의 바람, 민음사, 1975

 

 


 

 

박재삼 시인 / 대관령(大關嶺) 근처(近處)

 

 

여름을 가려주던

수수와 옥수수들은

잎이 바싹 마르고 누우래진 채

언덕 위로 언덕 위로 기어오르고

산그늘이 내려진 가운데

한머리 감자밭에선

흙을 떨어낸 감자가

가마니째로 온통

가을을 실어내고 있었네.

 

앞으로 저 언덕에는

가난하고 쓸쓸한 바람이

서러운 햇빛신부(新婦)를 짝하여 와서

겨우살이를 지낼

그 준비만이 남은 것인가.

 

기러기 날개처럼

철을 타는 저 언덕 밑을

내 육신도 시방

흔들리며 내닫고 있건만,

아, 세월 속을 흘러가고 있건만,

 

어쩔까나, 이것들,

내 고혈압(高血壓)과 위하수(胃下垂)와

또 한 친구 신경통(神經痛)들은

철도 모르고,

철따라 떠날 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진(陣)치고 있는 이 모순(矛盾)이여!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두 개의 못물

 

 

눈 온 다음 날 살아나는 햇빛이여, 한 못물이 반짝이는 옆에서, 또한 불현듯이 물빛 어리어 반짝이는 못물을 보아 내었다면…… 제일가는 사랑의 눈웃음에 응한 눈웃음 같은 거로서 두 개의 못물을 보아내었다면……

 

형제들아 형제들아 뼈저려 하였던 뼛 속에 우리의 사랑의 사는 길은 열려 있는 것, 등결이나 허전하거든, 우리의 등을 닮은 의초로운 그런 그 언덕에 쉬어, 사랑의 하늘인 못물을 보자.

 

살아서는 눈부셔 오는 것에조차 죄스럽다면, 죽어서 어질 수 있는 고인(故人)들의 소롯이 뼈 녹은 물이 저것 저 못일 수는 없는가. 하나는 우리의 할아버지뻘의 반짝이는 못물일 수 있는 것, 할머니뻘의 또 하나는 그것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피에 젖은 살에 젖은 부끄러움 때문에, 속에선 사랑한 우리의 붙임성 많은 아주머니를 또는 누이를 달리만 달리만 대해 온 것을, 마음 놓고 옳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의, 다른 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저승의 사랑의 변두리 구경밖에 더 되겠는가. 아직은 뼈가 추운 이승의 산 사람이 우리는 아니었던가. 잘못 사는 덕(德)이나마 우리의 얼굴은 우리의 천지로서, 눈물을 담은 두 개의 못물을 가진 산 사람이 우리는 아니었던가.

 

비듣는 가을나무, 동화출판공사, 1981

 

 


 

 

박재삼 시인 / 매미 울음 끝에

 

 

막바지 뙤약볕 속

한창 매미 울음은

한여름 무더위를 그 절정까지 올려 놓고는

이렇게 다시 조용할 수 있는가,

지금은 아무 기척도 없이

정적의 소리인 듯 쟁쟁쟁

천지(天地)가 하는 별의 별

희한한 그늘의 소리에

멍청히 빨려들게 하구나.

 

사랑도 어쩌면

그와 같은 것인가,

소나기처럼 숨이 차게

정수리부터 목물로 들이붓더니

얼마 후에는

그것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맑은 구름만 눈이 부시게

하늘 위에 펼치기만 하노니.

 

해와 달의 궤적, 신원문화사, 1990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