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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승아 시인 / 미모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1.

최승아 시인 / 미모사

 

 

건물옥상의 전광판은 매일 뉴스를 재배 중이다

 

발육이 더딘 새는 숨는 일에 더욱 골몰 한다

 

자란다는 건 얼마간의 두려움을 접는 것으로 시작 된다

 

움츠리는 일에 익숙한 새는 꽃으로 핀다

 

저수지 난간 끝에 선 사람들, 수면 위로 붉게 물든 얼굴을 들여다본다 곧 어두워질 애인들에 대해

 

노을은 아름다운 순간을 위해 창문을 포기 한다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선입견은 시작 된다

 

꽃은 구름을 우물거린다

 

물을 준 적 없는 뉴스는 오늘도 시들지 않는다

 

시집 『오프너』(현대시, 2019) 중에서

 

 


 

 

최승아 시인 / 큐브

 

 

첫 번째 방문을 노크 한다

방에는 서랍이 굳게 닫혀있고 콘솔위에는 소리없이 촛불이 타고 있다

 

두 번째 방문을 노크 한다

함박눈이 쌓인 침대엔 그들의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거울은 미동이 없다.

 

세 번째 방문을 노크 한다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벽을 더듬는다 벽에 걸린 ‘피레네의 성’이 조금씩 침식될지 모를 일이다

 

네 번째 방문을 노크 한다

그를 노크한 순간 태어난 광기, 그는 낮은 곳으로만 기어다니는 벌레가 된다 밀폐된 방엔 비밀이 누설되고 있다

 

다섯 번째 방문을 노크 한다

매일 밤 조금씩 그를 갉아먹는 벼랑, 그 쪽으로 다가간 것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악몽은 달을 품고 있는 내내 계속 된다 달은 낳을 때마다 사산 된다

 

여섯 번째 방문을 노크 한다

그는 끝내 열리지 않는다

 

시집 『오프너』(현대시, 2019) 중에서

 

 


 

 

최승아 시인 / 개안(開眼)

 

 

   불현듯 올려다본 하늘이 압박붕대에 가려져 있다 저음의 안개가 수술대기실에 깔리고 움츠렸던 망막이 더듬이를 세운다 수술용 가위가 사각사각 정적을 갉아 먹는다 핀셋으로 끄집어 낸 불안, 불투명한 저 유리벽은 언제 걷히는 걸까 우박처럼 쏟아지는 조명이 총총, 총총총 여자의 망막에 박힌다 눈이 부실수록 어둠은 환해진다 의사는 지금 만성적인 세상을 교체 중이다 눈을 감는다 유리벽을 뚫고 나온 빛이 물감처럼 번지기 시작한다


 


 

최승아 시인

1954년 부산에서 출생. 2012년 《시와 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프너』(현대시, 2019)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