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20
1
새가 죽었다. 참새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하늘을 조금 찢어 내어 덮어 주자.
누가, 더운 입김을 조금만 쐬어 주었으면.
새벽 산길을 오르다 보면 샘물가에 미리 와서 종종걸음으로 걸어다니는 흔히 지나쳐 버리거나 잊어버리기 일쑤인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어하는 새.
새가 죽었다. 하느님은 왜 노래와 날개와 가녀린 두 발목만 주었을 뿐 마지막 날 묻힐 무덤은 주지 않으실까.
2
하느님은 저 새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의 도시 짤스부르끄, 모짜르트가 묻힌 곳 사시사철 꽃 피고 눈스키 타는 착한 사람들이 사는 그 마을에 내리는 흰눈으로 다시 태어나 살게 해준다.
3
새는 노래봉지.
신(神)이 빚어 놓은 노래 봉지.
저들은 처음부터 노래 봉지였고 노래 봉지이며 노래 봉지로 남아 죽어서도 노래한다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26
하늘에다 누가 어둠을 불질러 놓았는가! 절망이 임종하시어 하늘의 언 창살에 갇혀 있다. 들판이 개 짖는 소리를 내도 하늘 쪽으로는 답장을 쓰지 않는다. 희망을 번역한 죄 산과 땅을 번역한 죄 시간을 번역한 죄 네 죄가 크다. 희망 대신 검은 광목천을 번역한 죄 땅과 산 대신 감옥을 번역한 죄 시간 대신 빈 소쿠리를 배달한 죄 내 죄가 더 크다. 나는 절망이 잡수실 사식(私食)을 하늘로 올려 보낸다. 거절당한다. 겨울 솜바지 한 벌 올려보낸다. 거절당한다. 시간의 소쿠리에다 흰 쌀밥 잘 지어 올려보낸다. 거절당한다. 털신 한짝에 영치금을 넣어 올려 보낸다 거절당한다. 드디어 나는 자신의 배를 째기 시작한다 간수들이 와서 막는다. 간수들은 희망의 따귀를 치기 시작한다 나는 반항한다 나는 코피를 흘리며 쇠창살에 갇힌다 절망을 두둔한 죄 보호 은닉하려 한 죄…… 간수들은 옛날 얘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너 같은 놈이 이곳에 들어왔었다 우리는 그놈의 힘을 누그러뜨리려고 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밤만 되면 쇠사슬을 가슴팍으로 우두둑 우두둑 끊었다 쇠땀을 쏟으면서 끊어 보였다. 자, 저 결박 당한 놈을 보시오 우리는 돈을 받고 터질 것 같은 삶의 폐를 구경시켰다 우리는 돈을 받고 터질 것 같은 삶의 심장을 구경시켰다. 옛날에 너 같은 놈이 또 이곳에 있었다 그놈은 아직도 쇠창살 속에서 살고 있다 그놈은 쇠사슬과 단둘이서 산다 쇠사슬의 아버지다 그놈은 자기가 걸친 쇠사슬을 자식처럼 아낀다 우리는 그놈에게 더 굵은 쇠사슬을 던지며 명령했다 자, 이것을 한번 끊어보라 끊어보라 그놈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도 쇠창살에 갇혀 있다 그놈은 쇠사슬을 끊지 않고 있다 터질 것 같은 삶의 분홍 폐와 심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놈은 쇠사슬을 끊지 않고 있다 일도 하지 않는다 멍하니 산(山)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놈을 내보내지 않고 있다 내보내지 않고 있다 그놈은 산(山)만 바라보고 있다 그놈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산(山)과도 같다.
산정묘지, 민음사, 1991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장정일 시인 / 요리사와 단식가 외 1편 (0) | 2020.06.02 |
|---|---|
| 오세영 시인 / 사랑 외 4편 (0) | 2020.06.02 |
| 배세복 시인 / 환난(患難), 것들로부터의 (0) | 2020.06.01 |
| 이우디 시인 / 난시 (0) | 2020.06.01 |
| 최승아 시인 / 브레이크타임 (0) | 2020.0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