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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사랑
잠들지 못하는 건 파도(波濤)다. 부서지며 한 가지로 키워 내는 외로움, 잠들지 못하는 건 바람이다. 꺼지면서 한 가지로 타오르는 빛, 잠들지 못하는 건 별이다. 빛나면서 한 가지로 지켜 가는 어두움, 잠들지 못하는 건 사랑이다. 끝끝내 목숨을 거부(拒否)하는 칼.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사랑하는 이에게
집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나 둘 밟는데 문득 당신이 보고 싶어집니다 아니, 문득이 아니예요 어느 때고 당신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은 없었으니까요 언제나 당신이 보고싶으니까요
오늘은 유난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 계단을 다 올라가면 당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어요 얼른 뛰어 올라갔죠 빈 하늘만 있네요
당신 너무 멀리 있어요 왜 당신만 생각하면 눈앞에 물결이 일렁이는지요. 두눈에 마음의 물이 고여서 세상이 찰랑거려요 그래서 얼른 다시 빈 하늘을 올려다 보니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네요
나, 당신을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햇살 가득한 눈부신 날에도 검은 구름 가득한 비오는 날에도 사람들속에 섞여서 웃고 있을때도 당신은 늘 그 안에 있었어요 차을 타면 당신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구요 신호를 기다리면 당신은 건너편 저쪽에서 어서오라고 나에게 손짓을 했구요 계절이 바뀌면 당신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 알고 있어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당신을 내 맘속에서 지울 수 없으니까요
당신 알고 있나요. 당신의 사소한 습관하나 당신이 내게 남겨준 작은 기억 하나에도 내가 얼마나 큰 의미를 두고 있는지 당신은 내 안에 집을 짓고 살아요 나는 기꺼이 내 드리고요
보고 싶은 사람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단 한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오늘도 나는 당신이 이토록 보고 싶고 그립습니다
오세영 시인 / 새벽
마루에 떨어진 채 금화(金貨)는 빛나고 가볍게 고요가 음반(音盤) 위에 쉴 때,
우랄 알타이 모음(母音)이 잠든 베갯머리에서 담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그리다가 꽃이여,
찰랑거리는 시간의 델타 위에 너는 묻히고 만가(輓歌)를 부르는 새벽, 모이를 줍고 있던 밤새들의 낮고 깊은 목소리.
문을 밀치면 투명한 방으로 걸어오던 초상화. 고요의 좁은 출구를 지나서 꽃 피듯 옷을 벗는다.
실내에서 나래치는 나비떼 선반에 얹혀 둔 햇빛을 털고, 무겁게 누운 저 평원(平原)을 깔고 앉아, 빛을 길어 올리는 동앗줄을 붙잡고 새벽은,
잿더미 위의 앙상한 하늘을 밀어제친다.
반란하는 빛, 현대시학사, 1970
오세영 시인 / 슬픔
비 갠 후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먼 산은 가까이 다가서고 흐렸던 산색은 더욱 푸르다. 그렇지 않으랴,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가 더렵혀진 대기, 그 몽롱한 시야를 저렇게 말끔히 닦아 놨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하늘은 신(神)의 슬픈 눈동자, 왜 그는 이따금씩 울어서 그의 망막을 푸르게 닦아야 하는지를, 오늘도 눈이 흐린 나는 확실한 사랑을 얻기 위하여 이제 하나의 슬픔을 가져야겠다.
오세영 시인 / 신념
꽁꽁 얼어붙은 겨울 밭, 무우 하나 땅에 묻힌 채 강그라지고 있다. 돌아보면 텅 빈 들판, 강추위는 몰아치는데 분노에 일그러져 시퍼렇게 하늘을 노려보는 그 눈,
뽑혀 생명을 보전하다가 일개 먹이로 전락하기보다는 차라리 뿌리를 대지의 중심에 내리고 스스로 죽는 길을 선택했구나.
승산 없는 전투가 끝난 전선, 지휘관을 따라 부대는 모두 투항해버렸는데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다 비인 들녘에서 외롭게 총살 당한 푸른 제복의 병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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