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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광규 시인 / 감로약수
마당에 나온 지렁이가 햇살을 몸에 박고 모래 위에서 뒹굴고 있다 몸이 말라 아무리 애써도 집으로 기어가거나 사람 발길을 피할 수 없다
삽날이 와서 찍거나 닭이 와서 주워먹으면 어쩌나 개미떼가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 가면 그러니 지금 지렁이에겐 구정물이라도 감로약수
눈도 머리도 뼈도 없이 입과 항문으로만 기어다니는 절체절명의 지렁이에게 누가 물을 다오 세파의 마당에서 목이 말라 쓰러져 뒹구는 나에게.
공광규 시인 / 미안하다
내 구둣발에 찍힌 거리들아 침을 뱉으며 지나온 동네와 도시들아 길에서 밟힌 풀잎들아 이유 없이 가지를 꺾인 나무들아 내가 자리를 옮긴 돌들아 내 이빨에 씹힌 고기와 채소와 과일들아 내 손에 털을 뽑히고 배가 갈린 닭들아 내 눈꼽과 오줌과 정액으로 더럽혀진 물들아 내가 서 있어 길목을 방해받았던 바람아 내가 미움과 적의를 품었던 사람들아 나와 너무 쉽게 스쳤던 육체와 성기들아 내가 넘봤던 여자의 남편들아 내 발길에 까닭 없이 채인 강아지들아 아무 잘못도 없이 내 발 밑에서 터져 죽은 벌레들아 내가 불경스럽게 대했던 경전(經典)들아 내 폭력에 떨었던 나보다 약한 것들아 폐지로 돌아간 내 시집 때문에 찍어 넘어간 나무들아 내 시로 더럽혀진 언어들아 내가 저지른 세상의 모든 상처들아.
공광규 시인 / 시작
겨울을 견딘 씨앗이 한줌 햇볕을 빌려서 눈을 떴다 아주 작고 시시한 시작
병아리가 밟고 지나도 뭉개질 것 같은 입김에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도대체 훗날을 기다려 꽃이나 열매를 볼 것 같지 않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겠고 어떤 꽃이 필지 짐작도 가지 않는 아주 약하고 부드러운 시작
갓난아이가 장차 뭐가 되리라고 짐작이 가지 않는 것처럼 시작은 다 이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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