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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송곳눈
내가 아는 환쟁이 영감은 그림 한 장 그려 달라고 하자 보는 앞에서 제 눈을 송곳으로 찌른 모양이야 보기 싫은 작자 영 보지 않겠다고 제 눈알을 파 버린 셈이지 재미있는 것은 그 영감이 파 버린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림은 그려 왔다는 점이야 두 눈을 뜨고 두루 세상을 보는 것보다 한쪽 눈만을 송곳처럼 뜨고 보는 편이 훨씬 참을 만했다는 거지 송곳 같은 눈으로 그림을 그렸으니 무엇을 그렸겠나 그려 놓고 나선 찢고 그려 놓고 나선 찢고 그림이란 그가 물 위에 써놓고 간 흔적일 뿐이지 물 위에 이름 뿌리고 간 영감 어느 바위틈에다 송곳눈을 박아 놓았을지도 모르지
하늘이불, 나남, 1987
조정권 시인 / 수유리(水踰里) 시편(詩篇)
여느 새벽보다도 일찍이 화계사 숲속의 약수(藥水)터로 오르다가 보았다. 자색(紫色)안개에 휘감긴 아름드리 태고목(太古木)들의 숙연한 전신침묵(全身沈黙)을, 한결같이 그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큰 바위들의 단좌(端坐)를. 그때던가 어제까지도 죽었다고 생각해오던 고목(古木)들의 출렁거리는 뿌리둥치께에서 놋쇠와 놋쇠가 부딪듯이 쩡 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 겨울내내 산중(山中)에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있는 어느 강철의 근육을 향그러운 쇠망치로 때려 깨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허심송, 영언문화사, 1985
조정권 시인 / 수유리(水踰里)에 사는 옹(翁)을
수유리(水踰里)에 사는 옹(翁)을 처음 뵈러 가는 날, 시장 근처 공터를 지나다가 백운대(白雲台)쯤에서 굴러 내린 듯한 집채만한 바윗덩이를 굵은 동앗줄로 꽁꽁 묶는 이를 만났다. 「바위는 이미 묶지 않아도 묶여 있는데 또 묶을 게 뭐요?」 「묶여 있다는 것을 당신들이 안 보니까 이렇게 묶는 거죠.」
기억나는 일이 있다. 두 번째 시집(詩集)을 어느 아는 분에게 드렸더니 며칠 후 책의 몰골을 열십자로 나눠 질긴 노끈으로 꽁꽁 묶어 보내왔다. 겉장과 속내용들을 한 장 한 장 풀을 발라 봉해 버린 채. 알겠다, 옹(翁)을 만나면서 책도 묶고 바위도 묶고 혀도 묶고 의미도 봉해 버리는 그 입.
허심송, 영언문화사, 1985
조정권 시인 / 숯덩이
혁명(革命)이나 정변(政變)으로 단련된 근육(筋肉)투성이가 숯이다 스스로의 권력(權力)과 오만으로 구워낸 것이 숯이다 사람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고 한다 살기가 어려워진 탓이겠지 남대문시장(南大門市場)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밟는다 저놈의 숯덩이 수많은 생계(生計)를 밟고 올라선 저놈 사람들은 숯을 사 간다 남보다 더 강렬해지기 위해서 남 앞에 서서 따지고 할 말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숯을 사 간다 할말을 하지 못하고 사는 저 병신 안주머니에 시커멓게 손발을 감추고 있는 것도 숯이다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들어가 손에 먹칠을 해가며 비틀어 죽인 것도 숯이다
비를 바라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 심상사, 1977
조정권 시인 / 심골(心骨)
한 덩이의 마음을 묵(墨)에다 개고 또 개면서 오랫동안 가슴으로 품어 온 비쩍 마른 갈필 하나로 풀어헤쳐 놓은 옛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일만개(一萬個)의 꽃송이를 전신에 단 꽃나무들이 한결같이 밤을 이루면서 몰려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어디선가 일만개(一萬個)의 꽃송이를 전신에 단 꽃나무들이 사방에 고요한 암향(暗香)을 끼얹으며 방울을 터뜨리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저마다 고요한 방울소리로 찰랑대다가 어떤 놈은 적음(寂音)속으로 스며들고 어떤 놈은 갈필 선(線)의 끝간 곳으로 미끄럼질을 타고 내려간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마르고 수척한 나뭇가지들이 점점 야위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림을 볼 때마다, 수척해가고 야위어가는 그놈들이 말라가면서 더 강골(强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詩)를 쓰는 내게는 이러한 일이 보통이 아니다.
백지 위에 별빛을, 민족문학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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