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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이별이란
어디에나 너는 있다. 산 여울 맑은 물에 어리는 서늘한 너의 눈매, 눈은 젖어 있구나. 솔 숲 바람에 어리는 청아한 너의 음성, 너는 속삭이고 있구나. 더 이상 연연해 하지 않기로 했다. 이별이란 흐르는 강물인 것을, 이별이란 흐르는 바람인 것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싸락눈 흩뿌리는 겨울 산방에 서러운 듯 피어오른 난 한송이, 시방 너는 내 앞에서 울고 있구나.
오세영 시인 / 잃어버린 시간(時間)을 찾아서
티겟을 사 들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렸다. 출구(出口)엔 역부(驛夫)가 하나, 잃어버린 시간(時間)을 체크하고 답사(踏査)를 떠나는 늙은 고고학(考古學) 교수(敎授)와 학생(學生)들과 상인(商人)이 서성거렸다. 창 밖 고층(高層) 빌딩엔 정치가(政治家)들이 기른 비둘기가 날고 개가 한 마리 주유소(注油所) 뒤뜰에 매어 있다. 차창(車窓)에 기대어 비에 젖은 이 시대(時代)를 바라보면서 술잔에 잠긴 도시(都市)의 황혼과 쓰디 쓴 감정(感情)을 들이마셨다. 비는 내려도 도시(都市)의 수목(樹木)은 시들어가고 낡은 화물열차(貨物列車)에 실려 떠난 여름은 한번 가서 와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떠나기 위하여 고립(孤立)을 두려워한다. 한때 가슴 떨리게 했던 말씀이나 눈빛도 행복(幸福)처럼 쓸쓸하게 떠날 것이다. 구겨진 지폐(紙幣)를 쥐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려도 백합(百合)의 뜰에 잠든 시간(時間)은 오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적막
'아' 하고 외치면 '아' 하고 돌아온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아'와 '어', 틀림없이 다르게 돌아오는 그 산울림. 누가 불렀을까, 산벚나무엔 다시 산벚꽃 피고 산딸나무엔 다시 산딸꽃 핀다. 미움과 사랑도 이와 같아라. 눈물 부르면 눈물이, 웃음 부르면 웃음 오느니 저무는 봄 강가에 홀로 서서 어제는 너를 실어보내고 오늘은 또 나를 실어보낸다. 흐르는 물에 텅 빈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봄날 오후의 그 적막.
오세영 시인 / 질그릇
질그릇 하나 부서지고 있다. 질그릇의 밑바닥에 잠긴 바다가 조용히 부서지고 있다. 스스로 부서져 흙이 되는 저 흔들리는 바다. 질그릇에 담긴 생선(生鮮)의 뼈, 질그릇에 담긴 폭풍(暴風), 질그릇에 담긴 공간(空間), 그 공간(空間) 하나 스스로 부서지고 있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찰칵
긴 것이나 짧은 것이나 영화 필름은 한 번의 작동으로 끝나버린다. 그러나 사진은 한 번 찍어 영원한 것. 영원을 긴 시간에서 찾지 마라. 내일 헤어질 운명의 남녀도 함 몸이 되어 뒹구는 오늘의 그 순간만큼은 내 사랑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무시무종(無始無終)이 어디 있겠느냐. 반짝 빛나는 플래시의 섬광 그 한 찰나가 바로 영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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