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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부다와 페스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8.

허민 시인 / 부다와 페스트

 

 

시린 손가락들이 잠든 다뉴브는 그 어둠조차 강물의 입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

얼마나 많은 뜨거움들이 캄캄한 물결 너머 안개를 피웠지

 

왜 보고 싶은 것들은 그렇게 늘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

 

분명히 한 장의 페이지인데 꼭 두 장이 붙어있는 듯

억지로 떼어 꺼내보려 하면 구겨지는 종이,

처럼 검은 강물은 흐르고

 

안개는 내리고, 부다와 페스트 사이, 그들과 나 사이, 너와 나 사이로, 불빛들은 출렁이고, 유람선들이 느린 눈동자처럼 깜박여

 

그림 위 덧칠을 하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그 사이로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영혼의 물결들이 흐르지

 

부다와 페스트를 지나며 너와 헤어졌다가 너와 다시 만나면, 그때 우리 사이로도 캄캄한 강물이 흘러갔다고 생각했지

 

그런 평범한 영혼들과 수세기가 이 강물의 손가락이 그리는 덧칠 같지, 덧칠 속에 잠든 안타까운 겨울의 숨들이 이 짙은 안개를 강물 위 띄운다고

 

모든 것이 그렇게 짧고 영원히 스쳐간다고

영혼의 흔적은 저토록 희고 차고 축축하다고

고민했지, 떠났지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발표

 

 


 

 

허민 시인 / 머리맡 아픈 자에게

 

 

어떤 오랜 나무의 봄을

무참히 꺾어 꽃병에 꽂아두었다

잠자던 그 색들은 천천히 꼭 한 번은 피었다가

또 조금씩 말라가며 한 계절 두 계절 져 내릴 것이므로

 

머리맡 아픈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 내게 상처를 주고

누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사랑이란 건 끝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말하면서

 

그냥 나무가 아닌 꽃나무의 낙엽을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한번은 꽃을 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한번은 그 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져 내렸기 때문이다

 

나무의 긴 그림자조차 그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스스로 선택한

영영 눈부신

죄인처럼

 

계간 『사이펀』 2020년 겨울호 발표

 

 


 

허민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