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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부다와 페스트
시린 손가락들이 잠든 다뉴브는 그 어둠조차 강물의 입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 얼마나 많은 뜨거움들이 캄캄한 물결 너머 안개를 피웠지
왜 보고 싶은 것들은 그렇게 늘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
분명히 한 장의 페이지인데 꼭 두 장이 붙어있는 듯 억지로 떼어 꺼내보려 하면 구겨지는 종이, 처럼 검은 강물은 흐르고
안개는 내리고, 부다와 페스트 사이, 그들과 나 사이, 너와 나 사이로, 불빛들은 출렁이고, 유람선들이 느린 눈동자처럼 깜박여
그림 위 덧칠을 하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그 사이로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영혼의 물결들이 흐르지
부다와 페스트를 지나며 너와 헤어졌다가 너와 다시 만나면, 그때 우리 사이로도 캄캄한 강물이 흘러갔다고 생각했지
그런 평범한 영혼들과 수세기가 이 강물의 손가락이 그리는 덧칠 같지, 덧칠 속에 잠든 안타까운 겨울의 숨들이 이 짙은 안개를 강물 위 띄운다고
모든 것이 그렇게 짧고 영원히 스쳐간다고 영혼의 흔적은 저토록 희고 차고 축축하다고 고민했지, 떠났지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발표
허민 시인 / 머리맡 아픈 자에게
어떤 오랜 나무의 봄을 무참히 꺾어 꽃병에 꽂아두었다 잠자던 그 색들은 천천히 꼭 한 번은 피었다가 또 조금씩 말라가며 한 계절 두 계절 져 내릴 것이므로
머리맡 아픈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못해 내게 상처를 주고 누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사랑이란 건 끝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말하면서
그냥 나무가 아닌 꽃나무의 낙엽을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한번은 꽃을 피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어도 한번은 그 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져 내렸기 때문이다
나무의 긴 그림자조차 그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 스스로 선택한 영영 눈부신 죄인처럼
계간 『사이펀』 2020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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