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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하석 시인 / 폐차장 1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9.

이하석 시인 / 폐차장 1

 

 

산에 가 붙들리고 싶다.

너의 어깨 위로 너의 모자 그늘 아래로

산이 멀리 있다.

 

우리가 다툰 지도 오래 되었다.

우리의 욕망이 서로 높아가는 만큼

산은 저렇듯 낮고낮다.

그러나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은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우리는 욕망의 기름 덮인 검은 흙 위에 앉거나

기름으로 탄 쇳조각 더미에 기대어 일어나며

늘 서로 조금씩 달아나면서

주검으로나마 저 산에 갈 수 있을지 서로 지쳐 묻는다.

 

측백나무 울타리, 문학과지성사, 1992

 

 


 

 

이하석 시인 / 폐차장

 

 

폐차장의 여기저기 풀죽은 쇠들

녹슬어 있고, 마른 풀들 그것들 묻을 듯이

덮여 있다. 몇 그루 잎 떨군 나무들

날카로운 가지로 하늘 할퀴다

녹슨 쇠에 닿아 부르르 떤다.

눈 비 속 녹물들은 흘러내린다, 돌들과

흙들, 풀들을 물들이면서. 한밤에 부딪치는

쇠들을 무마시키며, 녹물들은

숨기지도 않고 구석진 곳에서 드러나며

번져나간다. 차 속에 몸을 숨기며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바지에도

붉게 묻으며.

 

나사들은 차체에서 빠져나와 이리저리

떠돌다가 땅 속으로 기어든다, 희고

섬세한 나무 뿌리에도 깃들며. 나무들은

잔뿌리가 감싸는 나사들을 썩히며

부들부들 떤다. 타이어 조각들과

못들, 유리 부스러기와 페인트 껍질들도

더러 폐차장을 빠져나와 떠돌기도 하고

또는 흙속으로 숨어든다. 풀들의 뿌리 밑

물기에도 젖으며, 흙이 되고

더러는 독이 되어 풀들을 더 넓게

무성하게 확장시킨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 / 핀 1

 

 

돌멩이들에 걷어채여, 핀은 어깨와

손이 상했다. 풀들을 찢으며 꽃의 눈을 찌르며

신문지 조각들을 땅에 박아 놓으며, 핀은 어깨와

손뿐인 몸으로 길고 오랜 여행을 했다.

돌 틈에 누워 핀은 이제 아무 데도 걸림 없이

땅 속에 기어든다, 녹의 껍질이 자신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그 자신이 땅의 껍질이 되어,

이제는 무엇을 찔러 고정시켜 놓을 일도 까닭도 없이.

돌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핀은 막연하게

빈 얼굴로 밖을 내다본다.

 

투명한 속, 문학과지성사, 1980

 

 


 

이하석 시인(기자)

1948년 경북 고령군 출생. 전쟁 직후인 1953년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 그는 대명동 난민촌 언저리에서 자람.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1971년 '현대시학' 등단. 1978 영남일보 기자. 1980 대구매일신문 편집국 문화부 기자. 2005 영남일보 논설실 실장. 시집『투명한 속』(1980) · 『김씨의 옆 얼굴』(1984) · 『우리 낯선 사람들』(1989) · 『측백나무 울타리』(1992) · 『금요일엔 먼 데를 본다』(1996) 등을 냈다. 1990 제9회 김수영문학상. 1990 도천문학상. 1992 제4회 김달진문학상. 1996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