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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4
산정(山頂)이여, 우리들이 쏘아올리는 조포소리를 들으라. 저 아래 대지(大地) 밑바닥에 광야의 아들이 누워 있다.
그의 입은 굳게 닫혀 있고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으나, 불의 문신(文身)은 아직 식지 않았도다.
태양의 징을 치며, 강한 깃털의 새를 모우던 억센 팔뚝은 기도하는 듯 가슴에 모아져 있으나 두 손목은 안의 쇠창살을 부여잡고 힘을 주고 있고, 두 무릎은 굳건히 뻗어져 아직도 폭풍을 견딜 듯 우뚝 설 것 같도다.
그는 대지(大地)의 어머니가 흙바람 속에 낳아서 기른 강풍(强風)의 아들. 그야말로 폭풍우 속에서도 휘어 넘겨진 벼 이삭을 세운 여름의 아들. 그야말로 폭풍우 속에서도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대지(大地)의 아들이었다.
공중에 나는 종달새와 들판 메뚜기들의 친구였으며 허리께까지 차오른 들풀들을 쇠빗으로 순하게 길들이는 모래바람의 친구였다.
그는 시간의 높은 꼭대기에 계신 분에게 맨처음 거둔 포도열매를 바친 경배자였으며, 강가에서 잡은 물고기 다섯 마리를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광야의 돌산으로 올라가 굶으며 헤매 다닌 예언자.
홀로 있을 때 그의 눈빛은 하늘 빛에 젖어 있었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먼 곳에 계시나 가깝게 느껴온 그분이 거두어 갈 가까운 날을. 때가 되면 거두어 가리라. 때가 되면 거두어 가리라. 참담한 때가 오리라. 참담한 때가 오리라. (때가 되면 내 대신 너를 거두어 갈 자 있으니……)
너는 너의 주검으로 너의 시대를 증거하기 위해 이 지상에 온 것이다.
장엄함이여, 우리들이 하늘에다 쏘아올리는 조포소리를 받으라. 여기, 대지(大地)의 아들 하나 무참히 꺾이어 누워 있노니 그는 우리들 중 또다른 누구이겠는가. 그가 누구였는가를 우리 모두에게 이해하게 해다오. 우리들의 눈 멀었던 세월들을. 시대들을. 빛의 어둠으로 밝음을 내게 말하게 해다오. 도끼들이 살해한 죽은 밤나무의 입술로 말하게 해다오. 무기들을 처형시킨 용광로의 불길로 말하게 해다오. (위대한 사상을 고개숙인 벼이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시대의 허수아비가 되어 불러들인 새떼에게 곡식을 넘겨 준 것이다) 사실을 말하게 해다오. 오랜 세월 방석을 뭉개고 앉았던 성직자, 승려, 권력자들이 왜 돈을 깔고 앉는가를. 왜 수정(水晶)들은 깊은 바위산에 숨어 성장하면서 빛을 내지 않는지를. 왜 설산(雪山)의 암굴에서 평생을 보낸 선사(禪師)들이 미쳐 갔는지를.
흐트러진 입들을 한데 모아 이야기하게 해다오. 세계를 고사(苦辭)하다 고사(枯死)해 버린 고치들을. 맑게 깨어 있는 정신의 빙벽을. 한 시대의 짜라투스트라들을. 나에게 강한 새싹을 뿜어내는 사화산(死火山)을.
산정묘지, 민음사, 1991
조정권 시인 / 산정묘지(山頂墓地) 5
갈가마귀 울음 자옥이 잦아가는 언 하늘에 온통 시퍼런 청죽(靑竹)을 치겠다. 삭풍이여, 삭풍이여, 우리를 다시 한 몸으로 묶으라. 또 한 차례 땅 속 깊은 뿌리들을 출렁이게 하고 우리들을 다시 한 뿌리로 묶으라. 그리고 지상에 홀로 남아 칼을 입에 물고 노래하는 가인(歌人)을 오래 머물게 하라. 절복(切腹)의 시대가 온다. 삽과 망치와 깃대를 땅속 깊이 매장하고, 삭풍 앞에 나서 입에 문 칼끝을 삼키면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절복(切腹)의 시대가 온다. 한 뿌리에서 올라온 수천의 잎 다 찢겨가고 헐벗은 나뭇가지에 언 하늘 빛 뿜을 때 언 하늘에다 죽(竹)을 치며, 죽(竹)을 치며 자신의 발등에다 스스로 얼음을 터뜨리며 스스로 맨발로 얼음 위를 딛는…… 스스로 증명하는 이여. 증명하는 이여. 절복(切腹)의 시대가 오고 있다.
산정묘지, 민음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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