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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시인 / 선물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서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 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비무장지대의 모든 산들이 일제히 무장을 하고 나선 칠흑의 밤이었네 적인 듯 싶기에 쏘았지 힘없이 쓰러지데, 허전하게 불빛을 비추자 그것은 그러나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어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노루라거니 사슴이라거니 좋아 날뛰는 병사들 틈에서 대대장의 큰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수고했노라고 악수를 청하며 그런 식으로 하면 적을 잡을 수 있다고 친구여, 그가 나를 위로하였지 알겠노라고, 알겠노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참 알 수 없네 확인된 것은 짐승의 다리가 아닐세 네 다리는 살아서 죽음의 어두운 허공을 휘저으며 나의 살의를, 대대장의 살의를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살의를 입증하는 것일까 죽어가던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탄환처럼 완강히 내 가슴에 박혀 있네 (1978)
정희성 시인 / 쇠를 치면서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쟁이 고향서 올라온 봉제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떡을 치고 싶으면 용두질치며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버린 용칠이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 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동아일보> 1970.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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