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희성 시인 / 선물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9.

정희성 시인 / 선물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에게 남겨진 모든 시간을

심장이 멎은 뒤에서

두근대며 흘러갈 그 시간을

친구가 눈 감던 날

나 문득 두려움 느꼈네

이 사랑 영원할 수 있을까

그에게 시간을 선물했네

나 죽은 뒤에도 끝없이 흐를

여울진 그리움의 시간을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비무장지대의 모든 산들이

일제히 무장을 하고 나선

칠흑의 밤이었네

적인 듯 싶기에 쏘았지

힘없이 쓰러지데, 허전하게

불빛을 비추자 그것은 그러나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어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노루라거니 사슴이라거니

좋아 날뛰는 병사들 틈에서

대대장의 큰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수고했노라고 악수를 청하며

그런 식으로 하면 적을 잡을 수 있다고

친구여, 그가 나를 위로하였지

알겠노라고, 알겠노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똑똑히 확인했네

불빛 속에 떨고 있는 네 다리를.

 

참 알 수 없네

확인된 것은 짐승의 다리가 아닐세

네 다리는 살아서

죽음의 어두운 허공을 휘저으며

나의 살의를, 대대장의 살의를

우리 모두의 뿌리 깊은 살의를

입증하는 것일까

죽어가던 그 짐승의 마지막 눈초리가

탄환처럼 완강히 내 가슴에 박혀 있네

(1978)

 

 


 

 

정희성 시인 / 쇠를 치면서

 

 

쇠를 친다

이 망치로 못을 치고 바위를 치고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실한 팔뚝 하나로 땀투성이 온몸으로

이 세상 아리고 쓰린 담금질 받으며

우그러진 쇠를 치던 용칠이

망치 하나 손에 들면 신이 나서

문고리 돌쩌귀 연탄집게 칼 낫

온갖 잡것 다 만들던 요술쟁이

고향서 올라온 봉제공장 분이년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다던 용칠이

떡을 치고 싶으면 용두질치며

어서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용칠이

밀린 월급 달라고 주인 멱살 잡고

울분 터뜨려 제 손 찍던 용칠이

펄펄 끓는 쇳물에 팔을 먹힌 용칠이

송두리째 먹히고 떠나버린 용칠이

용칠이 생각을 하며 쇠를 친다

나 혼자 대장간에 남아서

고향 멀리 두고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식모살이 떠났다는 누이를 생각하며

팔려가던 소를 생각하며

추운 만주벌에서 죽었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떡을 칠 놈의 세상, 골백번 생각해도

이 망치로 이 팔뚝으로 내려칠 것은

쇠가 아니라고 말 못하는 바위가 아니라고

문고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밤새도록

불에 달군 쇠를 친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1977

 

 


 

 

정희성 시인 /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동아일보> 1970. / 시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1978)

 

 


 

정희성 시인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답청(踏靑)』(1974) 『저문 강에 삽을 씻고』(1978),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 『시를 찾아서』(2001) 『돌아다보면 문득』(2008) 등과 그 밖에 『한국현대시의 이해』(共著) 등이 있음.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1997년 시와시학상, 불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2014 제5회 구상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