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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란 시인 / 슬픔의 배후를 읽는 밤
그날의 언덕길에서 하늘을 흐리며 사방으로 흩어지던 진눈깨비를 만났다. 어쩌다 찾아온 시 한편이 오랜 권태가 무기력한 파지의 생으로 구겨져있던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담담한 표정의 계단을 올라 무심히 책갈피를 넘길 때 누군가 내 뒤통수를 때리며 당신은 애초부터 제목이 없는 문장으로 시작된 농담 같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눈을 감고 있었음으로 그의 등짝에 내 두툼한 손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아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으로 오래도록 슬펐다. 명확한 이유의 용서는 끝내 내 차례가 아니었다. 개구리 뒷다리를 붙잡아 이 다리가 누구의 다리냐? 네 다리냐? 내 다리냐? 허공에 외쳐보아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음으로 오는 봄을 다 건너지 못했다.
어쩌다 찾아온 너는 어디로 가야 이 고된 방황을 끝낼 수 있느냐고 길을 묻는다. 어둠의 요정이 살고 있는 들판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아야 한다고 아직은 더 살아봐야 한다고 속삭인다. 아침은 멀고 질문은 가깝고 별빛마저 창문을 흐리는 밤이다.
내 진한 슬픔의 배후엔 검은 장막의 껍질로 둘러싸인 그렁그렁한 눈물의 방이 촘촘하게 모여 산다. 그 방을 나오려면 회랑처럼 긴 밤의 속눈썹 아래 매달린 고요한 호수의 문장을 읽어야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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