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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미란 시인 / 슬픔의 배후를 읽는 밤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9.

이미란 시인 / 슬픔의 배후를 읽는 밤

 

 

그날의 언덕길에서 하늘을 흐리며 사방으로 흩어지던 진눈깨비를 만났다. 어쩌다 찾아온 시 한편이 오랜 권태가 무기력한 파지의 생으로 구겨져있던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담담한 표정의 계단을 올라 무심히 책갈피를 넘길 때 누군가 내 뒤통수를 때리며 당신은 애초부터 제목이 없는 문장으로 시작된 농담 같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눈을 감고 있었음으로 그의 등짝에 내 두툼한 손자국을 남기지 못했다.

 

아무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으로 오래도록 슬펐다. 명확한 이유의 용서는 끝내 내 차례가 아니었다. 개구리 뒷다리를 붙잡아 이 다리가 누구의 다리냐? 네 다리냐? 내 다리냐? 허공에 외쳐보아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음으로 오는 봄을 다 건너지 못했다.

 

어쩌다 찾아온 너는 어디로 가야 이 고된 방황을 끝낼 수 있느냐고 길을 묻는다. 어둠의 요정이 살고 있는 들판 끝에서 불어온 바람이 살아야 한다고 아직은 더 살아봐야 한다고 속삭인다. 아침은 멀고 질문은 가깝고 별빛마저 창문을 흐리는 밤이다.

 

내 진한 슬픔의 배후엔 검은 장막의 껍질로 둘러싸인 그렁그렁한 눈물의 방이 촘촘하게 모여 산다. 그 방을 나오려면 회랑처럼 긴 밤의 속눈썹 아래 매달린 고요한 호수의 문장을 읽어야 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2월호 발표

 

 


 

이미란 시인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1997년 《학산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준비된 말도 없이 나는 떠났다』(시와시학사, 1999)와 『내 남자의 사랑법法』(황금알, 2011)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