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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 / 너, 없음으로
너 없으므로 나 있음이 아니어라.
너로 하여 이 세상 밝아오듯 너로 하여 이 세상 차오르듯
홀로 있음은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이승의 강변 바람도 많고 풀꽃은 어우러져 피었더라만 흐르는 것 어이 바람과 꽃뿐이랴
흘러 흘러 남는 것은 그리움, 아, 살아 있음의 이 막막함이여.
홀로 있으므로 이미 있음이 아니어라.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등산(登山)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이는 생애(生涯)의 중량(重量), 확고(確固)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岩壁)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岩壁)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接近)한다. 행복(幸福)이라든가 불행(不幸)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오세영 시인 / 모래
결국은 한 알의 모래가 된다.
파멸(破滅)이, 저 존재(存在)의 중심(中心)에서 깨어진 접시가 이루는 완성(完成).
결국은 한 알의 결정(結晶)이 된다.
깨어지고 깨어져서 이겨 내는 괴로움, 그는 시방 바닷가에 서 있다.
들려오는 건 허무(虛無)의 바람 소리와 애증(愛憎)의 기슭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
가장 밝은 지상(地上)에서 뒹구는 결국은 한 알의 모래가 된다.
해조음(海潮音)이 된다.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문학사상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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